Fathers’ Note

찬바람에 겨울 냄새가 완연하게 묻어나는 계절입니다. 덩달아 주변에는 어른이고 아이고 독감과 감기로 고역을 치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요. 님은 괜찮으신가요? 이번 편지는 찬 계절을 맞아 할 일이 늘어난 이현이 아빠 규성님의 레터를 전해드립니다. 

“오늘 밤사이 다량의 찬 공기가 유입되면서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지겠습니다.”
“비가 그치고 북서쪽에서 차고 건조한 공기가 유입되면서 내일 기온은 평년보다…” 

올해 가을은 길다는 생각도 잠시, 곧 겨울이 찾아 온다는 일기예보가 퇴근길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차고 건조한 공기’라는 말에, 머릿속 할 일들이 푸시 알림처럼 쏟아졌다.

• 겨울 옷 빨래
• 가습기 청소
• 가습기 필터 구매
• …

집에 도착하니 아이는 등원할 때와 같은 옷을 입고 코를 훌쩍이고 있다. 코를 한두 번 훌쩍였을 뿐인데 내 불안은 인내심도 없이 가상의 미래로 향했다. 

밤새 차가워진 공기에 감기에 걸려 기침하며 일어나는 아이의 미래.
회사에 반차를 내고 소아과 오픈런을 해야 할 미래.

추운 날씨에 기침이 더 심해져 어린이집에 못 가고, 결국 나 또는 아내가 회사에 못 가는 미래…

모든 게 진짜가 될까 두려워 회사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아이를 따뜻한 물에 씻기고 두꺼운 잠옷으로 갈아입혔다. 따뜻한 목욕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주방의 소금을 가져와 양치물에 녹여 입가심을 시키고, 이마저도 부족해 비타민C 영양제 한 알을 물에 대충 풀어 '감기 안 걸리는 물' 이라며 건넸다.

제법 머리가 큰 아이는 ‘한 번 속아준다’는 표정으로 한 모금 맛보더니 두세 모금만 더 마시고 침대로 향했다. 내일 아침, 아이가 오늘처럼 멀쩡히 일어날지, 아니면 기침을 하며 깰지는 이제 하늘에 맡길 수 밖에. 

아이와 아내가 꿈나라로 떠난 걸 확인하고 나오니 밤 열한 시. 이제야 퇴근길에 떠올린 할 일들을 처리할 차례가 왔다. 시작은 빨래. 이사 후 처음 꺼낸 아이의 겨울 옷들을 드럼 세탁기에 넣고 세탁시간이 가장 짧은 모드를 눌렀다. 건조기에 못 넣는, 우리 집에서 가장 대접받는 사람의 연약한 옷이라 세탁기에서 빨리 나올수록 귀찮음의 끝도 빨라진다.    

세탁기가 도는 동안 가습기 필터를 새벽배송으로 주문하고, 남은 건 가습기 청소. 아이가 태어난 해에 사서 매년 청소할 때마다 선택을 후회하는 가습기지만, 새것을 사느니 이미 산 것을 오래 쓰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나사를 풀고 구석구석 먼지를 닦아냈다. (요즘 잘나가는 가습기 가격을 보면 더더욱 딴생각말고 청소를 열심히 해야한다.) 올해는 이 청소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야 겨울이 끝날까. 진짜 겨울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분해의 역순으로 부품들을 조립하다보니 생각도 역순으로 흐르는 느낌이었다. 

날씨 하나에 유난을 떠는 내 모습을 보니 아이 방의 온습도계 숫자 하나에 유난을 떨던 신생아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모든 게 불안해서 모든 걸 정확하게 관리하고 싶었던 시기. 오죽하면 장모님께서 사위의 예민함을 걱정하실 정도로 최적의 습도를 유지하기위해 수시로 방을 들락거리며 가습기를 조절했던 적이 있다. 당시 내가 조절했던 건 습도가 아니라 내 불안이었단 걸, 그 때는 왜 몰랐을까.   

예나 지금이나 변한 건 없다. 나는 여전히 아이 앞에서 과하게 불안해지고, 그 불안을 덮으려 과하게 무언가를 한다. AI는 이런 내 불안의 원인을 나보다 더 잘 알지 않을까 싶어 왜 그런지 묻자 내 뼈를 때리는 피드백을 주었다.    

•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불안 : 사람은 ‘확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타인이나 상황을 조율하려 합니다. 

• 자기 효능감이 낮을 때 : 자신의 영향력이 약하다고 느낄수록, 외부를 조종함으로써 ‘존재감’을 회복하려 합니다. 

• 과거의 상처나 실패 경험 : 예전에 혼란스러운 경험이 강할수록, 다시 그 혼란을 겪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관리하려 합니다.

• 책임감이 과도할 때 : 잘되게 하려는 마음이 통제로 변하기 쉽습니다. 선의로 시작한 관리가 ‘과잉 개입’으로 이어집니다. 

• 사랑과 보호의 왜곡 : 사랑하기 때문에 통제하려 하고, 돌보려다 억압하게 됩니다. 결국 사랑이 불안의 다른 이름이 되죠.

부모는 지키고 싶은 게 많다. 아이의 건강, 안전, 인성, 미래 등. 조심해, 조용해, 인사해, 친절해와 같은 잔소리가 자주 나오는 건 무언가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앞서서 일 때가 많다. 특히 건강과 안전 앞에선 타협을 하지 않는걸 넘어 빈틈을 허용하기가 쉽지 않다. 언젠가는 빈틈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는 걸, 그리고 그 빈틈을 아이 스스로 채우게 해야 한다는 걸 우리는 자주 잊는다. 

사실 하루이틀 조금 춥게 등원하고, 하루이틀 조금 건조하게 잔다고 감기 이상의 큰 병이 생기는 일은 드물다. 때론 완벽히 겨울옷을 입고 등원해도, 가습기를 잘 틀고 자도, 언제든 걸릴 수 있는 게 감기다. 그 하루이틀의 빈틈을 허용하지 못하는 쪽이 아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성장의 관점에서 크게 보면, 아이가 환절기를 몸으로 겪어보고, 피부로 건조함을 아는 건 너무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정답같은 위의 분석을 읽을수록, 내가 통제해야 할 대상은 아이도, 환경도 아니라 내 불안과 책임감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안이 클수록, 책임감이 과할수록, 내가 쉽게 통제형으로 변한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일부러라도 더 느슨해지려 노력하지 않으면, 아이가 성장할 틈은 더 줄어들지도 모른다. 아이가 크면 클수록, 내가 덜 채우는 만큼 아이 스스로 더 채울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서로가 더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다음날 아침, 아이는 다행히 콧물도, 재채기도 없이 눈을 떴다. 예보대로 날씨는 추웠고, 빨래한 옷은 하루 새 바싹 말랐다. 경험을 명분 삼아 얇게 입혀 등원시키기엔 아내 눈치가 보여 외출복은 든든하게 입혔다. 혹시라도 있을 바깥 놀이에서 눈·코·입으로라도 새 계절을 아낌없이 만끽하길 바랄 뿐이었다. 언젠가 이번 겨울도 벌써 끝났다고 느낄 때가 올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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