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역 근처에서 운동을 마치고 나왔는데, 옆 동네 주민에게 문자가 왔다. (부쩍 신앙심이 깊어진 주민은 나를 이름 대신 가톨릭 세례명으로 부르곤 한다.)

“야고버 형제님, 낼 저희 딸 수능 장소가 대동세무고등학교인데요. 안국역에서 500미터던데 오르막길인지 혹시 아시나요? 버스 탈까 택시 탈까 고민 중.”

그 문자를 받고서야 다음 날이 수능임을 알았다. 다행히 대동세무고까지 아는 길이다. 답신을 보냈다.

“아주 완만한 오르막인데 평지에 가까워요.”

큰 변수가 없는 한 다섯 살 송이도 언젠가 수능을 치를 거다. (AI가 이렇게 빠르게 발전 중인데 여전히 수능을 볼지 모르겠다) 그럼 나도 송이가 시험을 보는 장소로 가는 길의 경사도까지 신경을 쓰려나? 막상 견진성사까지 받고선 성당에 안 나간 지 오래라서 냉담 중인데, 그쯤 되면 성경 필사라도 하고 있겠지?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문득 내가 수능 치르던 때, 두 가지 장면이 떠올랐다. 2002년, 온 국민이 한일 월드컵을 응원하던 때 수능을 치렀으니 벌써 23년 전이다.

첫 번째 장면은 수능 전날이다. 엄마가 말했다.

“시험날, 짙은 회색 옷을 입으면 어때?”

당시 내가 자주 입던 옷은 밝은 베이지색 후드 점퍼. 아파트 옆동에 사는 사촌 동생은 같은 디자인의 짙은 색 점퍼를 입고 있었다. 사촌 동생은 나보다 키가 컸고, 옷도 한 치수 더 컸다. 평소 입던 익숙한 옷을 두고, 갑자기 다른 옷을 입으라고 하니 방어기제가 작동했다. 그때의 나는 엄마가 뭐라고 말만 하면 일단 부정하고 보는 못난이였다.

“싫어. 그냥 입던 거 입을래요.”

가뜩이나 마음이 여리고 염려가 많은 엄마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예나 지금이나 엄마는 신앙심이 깊은 가톨릭 신자다. 나중에 이유를 들어보니 (기도만으론 불안하셨는지) 다른 엄마를 따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점 보는 사람을 찾아갔는데, 내가 수능날 짙은 색 옷을 입으면 점수가 잘 나온다고 했단다. 못난 아들은 한술 더 떠 핀잔을 줬다.

“엄마 하느님 믿는다면서. 그런 사람 말을 왜 굳이.”

정작 당일에 내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원래 입었던 걸 입었나. 아니면 그래도 엄마가 사촌 동생에게 빌려온 점퍼를 가져와서 못 이기는 척 입었던가.

옷과 별개로 그해 수능 시험은 평소만큼 잘 본 느낌이 아니었다. ‘망했다’ 수준은 아니지만 ‘최선을 다했으니 여한이 없다’도 아닌? (냉정하게 말하면 그게 내 실력이었겠지.)

두 번째 떠오르는 장면은 수능날 저녁. 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집에서 먹었던가. 먹지 않았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거실을 등지고 방 침대에 누워 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눈가 아래로 눈물이 몇 방울 떨어졌다. 시험 점수에 대한 걱정, 엄마에 대한 미안함, 막막한 미래 등 고3 학생이 느낄 수 있는 여러 감정이 뒤죽박죽이 된 채 그저 누워있었다. 퇴근한 아빠는 차마 나에게 ‘시험을 잘 봤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등을 두드렸고 손으로 쓱 내 눈물을 훔쳤다. 수능, 그거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부모가 되면서 스스로에게 딱 하나 바라는 게 있다면 ‘자식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마음가짐이다. 얼마나 모순인가. 내 자식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은 본능이다. 이 본능을 거스를 수 있을까. 모르겠다.

이거 하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자식은 부모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못난 내가 그 사례이자 증거다. 짙은 회색 후드 입을 걸, 뒤늦게 생각한다. 내 자식이 잘될 수 있다면, 예수든 부처든 무속인이든, 또는 누군가의 지나가는 말이라도 귀담아들었을 엄마 마음을 이제는 이해한다. 사랑하는 존재 앞에선 한없이 취약한 게 당연하니까.

세월이 흐르면서 못난 자식도 철이 들고 있다. 점심 먹고 산책하는 길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무슨 일이야?”
“그냥 전화했어요. 식사하셨어요?”
“아직. 병원 검진 마치고 근처 백화점 왔는데 사람도 붐비고 시끌벅적하네.”
“아, 거기 얼마 전에 내부를 싹 고쳤던데요. 고속터미널 쪽 방향으로 가면 식당가도 근사해졌어요. 한 번 가보세요.”
“그래 가보마, 넌 밥 먹었니?”
“네, 밥 먹고 사무실 근처 한 바퀴 걷는 길이에요.”
“그래, 요즘 날씨 좋더라. 수현이랑 송이도 별일 없지? 수고해~.”

엄마는 오늘이 수능인 걸 잊으신 듯했다.

오후 5시 45분. 5교시까지 이어진 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모두 끝났다. 마침 송이의 유치원 하원 시간과 겹쳐, 계동길로 갔다. 반대쪽에서 오는 학생들이 한두 명씩 보였다. 엄마나 아빠와 함께 걷는 무리도 있었다.

어느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올해 수능 어려웠다던데, 괜찮았어?” “그래도 고생 많았어. 저녁 맛있는 거 사줄게.”

송이와 나는 삼삼오오 모여 있는 무리를 가로질러 다시 언덕을 넘어 집으로 갔다. 가는 길에 오늘 언니, 오빠들이 중요한 시험을 봤다고 설명해줬다. 수능에 관해 더 말하려다가 설명이 너무 복잡해질 것 같아 그만뒀다. 그래, 아직 먼 미래니까. 송이와 보내는 현재에 충실하는 게 낫겠지.

매해 수능 시즌이 되면 애잔해진다. 그간 고생한 수험생뿐 아니라 그들 부모까지 떠올리면 보늬밤조림같은 마음이다. 헛된 바람일지라도 되새겨 본다. 올해 수능을 마친 친구들은 너무 일희일비하지 않길. 점수만으로 나누기엔 친구들의 삶이 너무 길고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그리고 수험생 부모님들은 맛있는 음식 챙겨 먹으며 스스로에게 꼭 보상을 주시길. 수험생 가정의 평화를 빕니다. 아멘.

Illustration by 김파카(@kimpa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