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안녕하세요 님. 오늘은 아들의 사춘기를 맞고 동시에 본격 사십춘기 고민을 시작한 정민님이 보냅니다. 과연 무슨 일인지 정민님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집안에 묘한 냉기가 흐른다. 아이는 도끼눈을 뜨고 나를 쳐다본다. 나도 나대로 언성이 높아진다.

‘쟤가 내가 알던 그 애가 맞나…?’ 

사춘기가 오고 있다. 드디어, 우리 집에도. 

곧 만 열두 살 생일을 앞둔 수현이는 키가 이미 엄마와 어깨를 견줄 정도로 자랐다.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더이상 아이라고 하기보단 소년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해 보인다. 생일을 지나 만 12세가 되면 항공권을 예약할 때 더이상 소아가 아니며, 호텔을 예약할 때도 마찬가지로 성인으로 간주된다. 

문제는 나와 아내다.

소년 안에는 아이가 있다. 점점 애기티가 벗겨지고 있다고는 해도, 여전히 가르쳐줘야 할 게 산더미다. 그러다보니 점점 부딪치는 부분들이 늘어나고 있다. 아이는 스스로 해보고 싶은 것도 많고, 혼자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시키지만 맘에 안 드는 것, 예전에는 잠자코 따랐지만 이제는 더이상 따르기 싫은 것들이 제곱으로 늘어난다. 

가장 다툼이 있는 건 시간에 관한 부분이다.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아이는 나름 바쁘다. 그 와중에 친구들과 시간맞춰 로블록스 게임 모임도 해야 하고, 새로 나온 만화책과 애니메이션도 챙겨 봐야 한다. 내일까지 마감인 숙제를 하기 위해서는 자신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는 꾸무럭꾸무럭…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뤄본다. 

그걸 옆에서 보고 있는 부모는 속이 터지고, 참다 참다 결국 큰소리가 난다. 

“왜 나한테만 그래! 주은이한텐 안그러고!!“
“뭐? 6학년이 2학년이랑 같아?”
“몰라~! 맨날 나만 미워하고!”

지난 추석은 위기였다. 긴 연휴동안 계속 붙어있다 보니 서로간의 긴장도가 더욱 심해졌다. 엄마한테 매일같이 잔소리를 듣는 것도 고역이겠다 싶어 연휴 중 하루는 아이를 데리고 근교에 나가 하룻밤 자고 왔다. (아이가 좋아하는) 초밥도 사먹고, (내가 좋아하는) 강화도 절에 가서 대추차를 마시며 빗소리도 듣고 하며 나름 기분전환을 하고 왔으나, 집에 오니 다시 반복이다. 뭐 하루 남짓한 바깥 나들이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겠지만. 

앞으로 몇 년간은 여기서 더 심해지면 심해지지, 나아지진 않지 않을까. 중2병이라는 용어가 괜히 있는 것은 아닐테니. 뭔가 지금껏 경험치 못한 더 큰 게 다가오는 느낌이라, 걱정이 두근 반 세근 반 한다. 이때껏 보아왔던 아이가 아닌, 새롭게 태어난(!) 다른 아이와의 마주침이 될지도 모른다. 

가보지 않은 길은 늘 두려움이 앞선다. 과연 이 시기를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아이도 부모도 상처받지 않고 건강하게,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날 수 있을까. 그러려면 아내와 난 무얼 어떻게 해야 할까. 십 년 넘게 육아중이라고 하지만 이런 미션은 또 처음인데. 

무거운 마음을 안고 월요일 회사에 출근하니 또 다른 의미에서 묘한 냉기가 흐른다. 연말 인사시즌은 환송과 송별의 연속이다. 매년 겪을 때마다 쉽지 않지만, 올해는 여러가지로 또 다른 느낌이다. 생각보다 변화가 커서인지 근 이십 년 가까이 일하는 중이지만 이 정도로 복잡한 마음은 또 처음이다. 

오륙 년 전, 예전 회사 선배와 같이 저녁을 먹은 적이 있다. 선배는 당시 오십을 갓 지났었는데, 지나온 사십 대에 쉽지 않은 순간들이 몇 번 있었다고 소주 한 잔을 곁들이며 털어놓았다. 회사에서 일하다 예상치 않은, 속된 말로 ‘맛이 가는’ 상황이 생겼는데, 집에 돌아 왔더니 당시 사춘기였던 아이도 비슷한 상황이더란다. 겪어보니 사십대는 그동안 살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일과 가정 모두에서 이중의 어려움이 닥칠 수 있는 시기가 될 수도 있을 거라고 담담히 이야기했었다.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날 선배의 이야기가 불현듯 다시 떠올랐다. 옆에서 고기를 뒤적이며 흘려들었던 삼십 대 때에는 그리 와닿지는 않았었던 그 얘기가. 사십춘기인가..

‘돌봄의 끝은 자립이고, 자립의 끝은 내가 나의 삶을 잘 사는 것입니다.’

송길영 작가는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육아는 끝이 없다지만, 어쨌거나 아이가 법적으로 성인으로서의 자격을 갖췄을 때 1차적으로 끝이 난다. 사춘기는 성인됨을 앞두고 누구나 겪는 성장통이고, 수현이는 이제 막 그 초입에 서 있다. 

먼저 삶을 살아 본 부모가 보기에는 모든 게 못내 부족해 보이고 답답해 보이겠지만, 결국 삶은 본인의 것이고 어느 순간부터는 혼자 스스로 개척해나갈 수밖에 없다. 옆에서 자전거 타는 방법은 가르쳐 줬지만, 자전거를 타고 앞으로 나가는 것은 결국 아이 스스로였던 것처럼.

사춘기가 끝나고 성인이 되어도 삶은 계속된다. 이십 대에는 이십 대라서, 삼십 대에는 삼십 대라서, 사십 대에는 사십 대라서 또 고비가 온다. 알게 모르게 버팀목이 되어주던 부모는 그때마다 점점 더 늙고 작아져서, 스스로 헤쳐나가야만 한다. 동시에 아이들의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하면서. 

'나는 온전히, 내 삶을 잘 살고 있나?'

아이를 보던 눈을 들어 조용히 나를 돌아본다. 나는 자립에 성공하고 있는가. 

아이가 같이 있는 시간을 따져본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하루에 길어야 한두 시간 남짓. 야근을 하거나 외부 일정이 있으면 그마저도 없이 지나간다. 한 주에 열 시간으로 잡고 1년이면 520시간, 만 19세 성인이 될 때까지는 7년 남았으니 3,640시간. 헤아려보니 생각보다 많지 않다. 한 뼘씩 자랄 수록 그 시간이 더 줄어들면 줄어들었지 늘어나진 않을 것이다.

그 사이에 시간 관리하는 법도 가르쳐 줘야 하고, 돈 관리 하는 법도 가르쳐 줘야 한다. 가르쳐야 할 게 여전히 많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어쩌면 ‘그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삶의 목표가 거창한 게 아니고 ‘잘 사는 것’이라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와 함께 좋은 추억을 많이 쌓아가는 것 이상의 목표를 나는 아직은 찾지 못했다.  

남은 3,640시간도 어쨌거나 지나갈 것이다. 생각보다 길지 않은 그 시간 동안 나는 아이들 옆에 앉아 같이 만화책을 보고, 애니도 보고, 가끔은 절에 가서 빗소리도 듣고, 이곳저곳 여행도 가며 하나 하나 서로의 기억을 채워가고 싶다. (지난 정우님 레터를 보니 노래방도 가보고 싶어졌다.) 

덧. (사춘기 수준이 아니라) 암흑기를 통과한 한화이글스가 올해 준우승을 했다. 아쉽지만 잘했다. 충분히 행복했고 그랬으면 됐다. 게다가 언젠간 아이들과 함께 우승을 지켜볼 것이라는 기대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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