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ice

Fathers’ Note

“송이랑 알프스 보이는 놀이터에 한 번 가봐야 하는 거 아녜요? 둘이서 여기까지 왔는데.”

무계획으로 스위스 취리히에 온 지 일주일 가량 지났을까. 현진이 말했다. 그는 송이와 내가 머물던 숙소의 호스트다. 아직 아이는 없지만, 대학교에 있을 때 취리히 놀이터에 관한 리서치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도 있어서 현지 정보에 능통했다.

“오, 그런 곳이 있어요?”

내가 답했다. 송이의 첫 여름방학 동안 어떻게 지낼지 막막해하다가 스위스로 온 터라 꼭 가야 할 곳도, 관람해야 하는 프로그램도, 먹어야 하는 음식도 없었다. 그나마 숙소 근처 마트에서 사 먹는 스위스 유제품이나 과일, 감자칩, 맥주, 초콜릿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차피 난 휴가가 아니었으므로 송이가 잠들 때면 틈틈이 업무를 봤다.

내심 아이와 단둘이 지내는데 무슨 계획이 필요할까 싶기도 했다. 동행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아이와 주로 다닌 곳은 근사한 미술관, 박물관, 카페가 아닌 놀이터였다. 그나마 현진이 가볼 만하다고 추천한 놀이터 위주로 다녔다.

스위스에서 관찰한 몇몇 놀이터는 서울의 그곳들과 조금 달랐다*. 취리히, 베른, 빈터투르에서 본 공공 놀이터는 대체로 투박하고 거친 느낌이 있었다.

* 물론 일부 사례만으로 단순히 비교하는 건 어렵다. 게다가 한국의 경우, 대부분의 놀이터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고 그마저도 아파트 단지 내에 있어 동네마다 편차가 크다. 주택건설기준 등에 관한 규정 제55조의2에 따르면, 150세대 이상의 주택단지에는 어린이놀이터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한다. 요즘의 신축 아파트에 지어지는 어린이놀이터는 대체로 안전과 쾌적을 강조하며 물놀이가 가능한 테마형 놀이터로 조성되기도 한다.

취리히의 한 곳이 인상적이었다. 우뚝 솟은 미끄럼틀 2개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꽤 높은데?’

송이도 처음엔 겁을 먹은 느낌이었다. 초반에 송이와 함께 오른 다음, 안고서 미끄럼틀을 몇 차례 내려왔다. 어른인 내가 느끼기에도 재밌었다. 미끄럼틀까지 오르려면 듬성듬성 나무로 이뤄진 구간을 지나야 했는데, 까딱 발을 헛디디면 아래로 떨어지면서 크게 다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곳에 머무는 동안 떨어지는 아이는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나중에는 송이 스스로 가보겠다고 하더니, 알아서 미끄럼틀을 신나게 탔다.

△ 이 놀이터는 여정 동안 세 번 정도 갔다.

어느날은 취리히에서 기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빈터투어를 찾았다. 현진을 통해 다른 한인 가족을 소개받았고 마침 송이와 나이대가 비슷한 아이를 키우는 분이었다. 그 친구도 활달하기론 송이 못지않았다. 이날도 송이에겐 새로운 도전이 있었다. 높이 오르는 것까진 좋은데, 내려올 땐 기다란 봉까지 점프한 다음 그걸 잡고 내려와야 했다. (적어도 한국에선 아직까지 시도해보지 않은 상태였다.) 친구에겐 워낙 익숙한 곳이었는지 거리낌 없이 올라서 점프한 다음 봉을 타고 내려오길 반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자극받은 송이도 몇 번을 머뭇거리며 시도하더니 결국 내려오는 데 성공했다.

현진이 알려준 알프스가 보이는 놀이터는 송이와 나에게 새로운 목표가 됐다. 당시 차를 빌린 상황도 아니라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다. 경로를 살펴보니 편도로만 4시간이 넘었다. 음, 이거 정말 갈 수 있을까? 혹시라도 귀가가 너무 늦어지면 근처에서 1박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지만 인근 숙소를 살펴보니 극성수기의 스위스 산장은 (대관령의 어느 허름한 펜션 같아 보여도) 1박에 100만 원을 가뿐히 넘겼다.

드디어 D-day. 알프스가 보인다는 그곳, 알멘트후벨로 가는 날. 여행 16일째였고, 사흘 뒤엔 귀국 날이었다. 결과적으로 여정은 무사히 마쳤다. 이른 아침 버스를 타고 취리히 공항역까지 간 다음, 기차를 타고 베른, 인터라켄, 라우터브루넨을 거쳐 뮈렌까지 가야 했다. 직행 같은 건 없었다. 사이사이 기차를 갈아타거나 케이블카를 탔다. 오랜 시간을 지나 일단 도착한 것만으로도 기뻤다.

송이도 기뻐했다. 난생처음 본 알프스의 풍경도 신기했겠지만, 거기에 그네가 있다는 사실을 더 반가워했다. 52개월 무렵의 송이는 그네를 좋아했다. 그네에 탄 송이는 이따금 내게 자기 등을 세게 밀어달라고 주문했다. 여느 때처럼 그네를 열심히 밀었는데, 하늘을 향해 붕 떠 있는 송이 앞에 설산이 보이는 풍경이 꿈같았다. 종일 그곳에서 놀다가 6시쯤 출발해 밤 10시 반쯤 취리히 숙소에 도착했다. 송이는 기차에서 잠시 뻗어 잠들었다가 깬 다음, 다시 기차 2등칸에 있는 놀이터에서 또 놀았다. 이날은 현진이 끓여준 뜨끈한 소고기뭇국을 먹고 둘 다 꿀잠을 잤다.

Father's Update

지난 레터(150화 아이들과만 떠나는 여행)에 보내주신 답장을 소개할게요. 고맙습니다.

💬 으악 ㅠㅠ 저희도 신혼집에 계속 살고 있는데 초등학교가 멀어 이사를 고민중입니다 ㅠㅠ 왜 그때는 몰랐을까요 동네에 어르신들이 많아 조용하고 고즈넉했는데 아이가 생기고 나니 동네에 아이를 위한 인프라가 적다는 걸 이제야 알았네요 ㅠㅠ 게다가 집 값도 어마어마하게 올라버려 초품아는 무시무시한 대상이 되었네요 부모로 살아가기 막막합니다 그래도 아이를 위해 최선의 여건을 마련해줘야겠죠! 힘냅시다 엄빠들이여! (손리무)

💬 오늘의 레터가 유독 마음에 와닿네요, 내년, 아이가 학교가기 전 거창한 목적 없이 그저 많은 곳을 함께 여행하며 추억을 쌓고 싶어서 육아휴직을 계획하고 있는 저에게 힘이 되는 내용이라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다들 그러더라구요 왜 그런 방식(?)으로 육휴를 쓰는지 뭐라도 생산적(?) 이거나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걸 해야 하지 않느냐는 조언과 함께. 저의 목적은 아이와 함께 즐거운 기억을 많이 만드는 것이니 남은 기간 흔들리지 않고 휴직을 준비해보려 합니다. 레터 감사합니다. (엄마)

💬 “결정을 번복할 수 없다면 그 결정을 정체성 삼아 살아가면 될 것이다.” 이 문장이 특히 남았습니다. 저는 삶에도 ‘컨셉’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모든 선택에는 왜 그렇게 해야 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컨셉이 있고, 그 안에는 언제나 내가 가장 중요하게 두고자 하는 근거가 있겠지요.
많은 이들이 학군지의 사교육 투자에 매진한다고 해서, 내가 가진 여러 역할 중 ‘아이에게 많은 것을 주려는 부모’로서의 자아가 내 모든 결정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긴 가치, 그걸 통해 내린 결정 안에서 그것을 나의 정체성으로 삼고, 그 안에서 아이와 함께 최선의 행복을 고민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헌터)

님, 오늘 보내드린 편지는 어땠나요? 썬데이 파더스 클럽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 제안, 피드백, 질문이 있다면 아래 링크를 통해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