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금요일 저녁에 자유 시간 줄게.”

아내가 호기롭게 말했다. 모처럼의 자유 시간. 자유 시간에도 의무적으로 챙겨야 할 일은 있다. 마침 자동차 종합검사 만료일이 임박한 때였다. 동네 근처에 검사소가 없어서, 동대문구 답십리까지 갔다.

다행히 검사 결과는 ‘합격’. 이제부터 자유다. 뭘 하면 좋을까.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영화를 본 게 언제였더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근처 영화관을 검색했다. 다들 F1을 소재로 한 브래드 피트 주연의 영화가 재밌다고 하던데. 러닝 타임이 길어 보였다. 소중한 자유 시간에 영화 보는 데 2시간 넘게 쓸 순 없지.

온전히 나를 위한 한 끼를 만들어 먹자. 검사소 근처에 대형 할인 마트가 있었다. 마트에서만 판다는 햇감자칩과 할인 중인 구이용 소고기, 레드 와인을 한 병 샀다. 다른 식자재도 샀다. 올해 다섯 살이 된 딸은 초당옥수수보다는 찰옥수수가 더 좋다고 했다. 딸을 위해 찰옥수수 몇 개 구입. 토마토, 마늘, 라면을 조금 샀다. 음, 물가가 그새 더 오른 느낌이다.

어느덧 저녁 8시 반. 집으로 가는 길에 허기를 달랠 겸, 계산대 앞에 놓인 초콜릿바까지 장바구니에 담고 계산을 마쳤다. 장을 보고 나니 피곤해졌다. 

아내는 지인과 서로 아이를 데리고 만나 저녁을 먹는다고 했다. 지인의 아이도 내 아이와 또래다. 넷끼리 잘 있으려나? 집으로 운전하는 길에 전화를 걸었다.

잠깐. 데리러 간다고?
나 오늘 자유 시간인데?

 △ 소중한 자유 시간에 자동차 검사를 마치고, 청량리 근처에 있는 마트로 갔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 10년 전만 해도 자녀 계획은커녕, 결혼 생각도 없었다. 책임져야 할 사람 없고, 그저 나 하나 챙기면 되는 단출한 인생을 즐기며 살고 있었고, 앞으로도 충분히 그렇게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연애도 진득하게 하지 못하는 내가 누군가와 같이 살 수 있을까? 2015년 회사를 그만두고 모터사이클로 유라시아를 횡단하는 여행은 그런 믿음을 기반으로 구현됐다. 소중한 사람과 결혼을 앞두거나 착실하게 커리어를 쌓고 있는 사람은 대체로 이런 무모한 여행을 떠나지 않는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모터사이클에 홀로 앉아 종일 달렸다. 스로틀을 당길 때 들리는 배기음과 헬멧에 바람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두 달이 지났을 무렵, 사람이 진심 그립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길 위에서 제아무리 멋진 풍광을 마주해도 금세 감흥이 떨어졌다. 스스로 비혼주의자라는 믿음에도 서서히 금이 갔다.

8월 중순, 노르웨이에서 부모님 연배의 유렉과 루시 부부를 우연히 만났다. 이 부부는 내 또래 자식이 셋이나 있다며 지갑에서 자식 사진을 보여주곤 폴란드 집으로 꼭 놀러 오라고 했다. 유렉의 초대에 응하고자 파리에서 크게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 폴란드 남동부에 있는 공업 도시 제슈프로 갔다. 스산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비에슈차디 국립공원에는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고 있었다. 10월 하순이었다.

폴란드 부부와 함께 한 일주일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입양된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 경험이 여전히 기억에 남는 까닭은 단순히 여행자인 내게 베푼 호의 때문만은 아니다. 당시 유렉의 나이는 예순다섯. 그는 루시 앞에선 늘 장난기 가득한 소년이었다. 퇴근 후엔 집에서 루시와 식사를 하고 저녁에 동네를 산보했다. 결혼 또는 학업으로 이미 독립한 자녀 셋과는 소원하지 않을 정도로 만남을 유지했다. 어쩌면 당연한데,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이상적인 부부와 가족의 모습을 재발견한 느낌이었다. 그들과 생활하는 동안 결혼에 대한 생각이 긍정적인 쪽으로 많이 바뀌었다.

바르샤바를 향해 시동을 걸고 떠나는데 그들이 끝까지 서 있는 모습이 사이드 미러에 비쳤다. 그 풍경이 문득 여행을 떠난 첫날, 나를 배웅하는 어머니의 모습과 겹쳐 눈에 밟혔다. 부메랑처럼 나의 원점, 집으로 가기 위해 먼 길을 돌아온 여행이었다.

여행 중 품은 화두 중 하나는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였다. 중요한 건 ‘누구’가 아닌 ‘나’였다. 집으로 무사히 돌아온 다음, 그 질문에 대해 스스로 내린 답은 이랬다. ‘자기중심을 지킬 수 있다면, 어느 누구와 살든 잘 지낼 수 있겠다.’ 유렉과 루시 부부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관찰하면서 용기를 내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2018년 5월 12일, 지금의 아내 수현과 결혼했다. 수현은 내가 모터사이클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알게 된 사람이었다. 우리 결혼식에는 폴란드에서 한국으로 날아온 유렉과 루시 부부도 참석했다.

 △ 2015년 폴란드에서 다시 만난 유렉+루시 부부

7년이 흘렀다. 지난 결혼 생활을 두 마디로 표현하면 ‘부대끼는 삶’이다. 부대끼다는 말에는 다른 것에 맞닿거나 자꾸 부딪치며 충돌하다는 뜻이 있다.

돌이켜보면 나에게 일어난 대부분의 변화는 결혼 때문이었다. 결혼하면서 처음으로 부모에게 독립했고, 결혼하면서 처음으로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배웠다. 부부의 세계로 먼저 건너간 친구들은 원만한 공존을 위한 팁을 전했다. “항상 먼저 사과하렴”, “(아내와 다퉈봤자) 이미 전쟁에서 졌으니 전투는 의미 없어. 전투에서 이기려고 발버둥 치지 마”. 성인 두 사람이 갑자기 한 지붕 아래 살아야 하는데, 마찰이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우리 부부도 다양한 문제로 티격태격했다.

결혼하기 곤란한 시대라는 말이 무색하게 기쁜 순간이 많았다. 어쩌다 보니 신혼 때는 수십 번의 집들이를 했고, 아내는 결혼 1주년을 맞아 그간의 살림살이를 정리할 겸 친구와 동네 사람을 초대하는 ‘중고 부부 장터’를 제안하기도 했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밥 한 끼 먹으며 기념하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과 웃음을 나누는 게 더 우리답다고 느껴서 동의했다.

한편 결혼했기 때문에 겪은 슬픔도 있었다. 신혼 첫해 겨울, 아내가 덜컥 임신하면서 이대로 부모가 되는 줄 알았다.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몇 주 뒤 임신 초기 유산을 진단받았고, 우리 부부는 추운 계절을 보냈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는 표현은 사실이었다. 부부 사이는 그 사건을 계기로 더욱 돈독해졌다. 우리는 그 후 두 번의 봄을 더 맞이했고, 세 번째 봄날 벚꽃잎이 만개할 무렵, 딸을 얻었다.

두 사람에서 세 사람이 되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변화다. 이 글에서 육아까지 말하기엔 애매하므로 몇 가지만 팩트 위주로 짧게 적어보겠다. 아내는 육아휴직을 마치고 사업을 시작했다. 나도 뒤이어 1년의 육아휴직을 썼다. 육아휴직 동안 18개월 딸과 부산 광안리 바다 앞에서 한 달 동안 지내기도 했다. 너무 어린아이와 타향살이를 하는 건 미친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인간은 실수를 반복한다. 성수기 동안 사업으로 바쁜 아내를 두고 또 한 번 모험을 감행 중이다. 고집불통인 다섯 살 아이를 데리고 스위스 3주 여행. 이번에도 역시 쉽지 않았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컨택트(Arrival)>는 시간 개념을 뒤집는 SF 영화다.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 순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가정 아래, 우리의 기억과 선택에 대해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가령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를 알고 있을 때, 현재의 ‘나’는 여전히 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현재와 미래를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 영화는 묻는다.

개인적으로는 영화 후반부에서 주인공인 루이스와 이안이 나눈 대화가 인상적이었다. 루이스를 사랑하는 이안은 루이스에게 아이를 갖고 싶은지 물었고, 루이스는 (딸 한나가 희귀병으로 인해 죽을 것임을 알면서도) “예스”라고 답한다.

스스로에게도 묻곤 한다. 내가 만약 결혼하지 않았다면? 수현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삶은 분명 다른 방향으로 흘렀겠지.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결혼을 미화하려는 건 결코 아니다. 부대낌으로 인해 강렬히 살아 있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어 지난 선택을 긍정할 뿐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가까운 곁에 가족이 있다는 건 행운이다. 이건 내가 결혼한 덕분이다.

뉴욕에 있는 삼촌과는 요즘도 종종 대화를 나눈다. 삼촌의 말을 들으며 내 인생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부부로서, 아이와 더불어 사는 가족으로서 더 나은 삶을, 더 나은 사회를 꾸릴 수 있을지 고민한다. 삼촌 말처럼 내가 이미 결혼했기 때문이다.

다시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찍으니 20분이 찍힌다. 상왕십리역 삼거리에서 우회전 대신 좌회전으로 방향을 튼다. 아, 모처럼 육아에서도 해방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제 발로 아내와 아이를 향해 가는 모습이라니.

결국 그날은 저녁을 늦게 먹었지만, 잠깐의 자유만으로도 달콤했다. 별 걸 하지 않았지만 행복했고 감사했다. 결혼이란 뭘까. 다시 태어나면 또 결혼할 수 있을까? 지금의 아내와 지금의 아이가 아니라면,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것 같다. 부대끼는 삶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 그 충분한 감정으로 하루하루 살고 있다.

 △ 이번 글은 남성지 아레나에서 만든 웨딩 북 <아레나 groom>에서도 읽어보실 수 있어요.

Illustration by 김파카(@kimpa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