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안녕하세요 님, 더위는 잘 피하고 계신가요? 오늘은 아무 생각없이 물놀이하러 갔다가 꿈을 접겠다는 딸의 돌발선언에 말문이 막혔다는 정민님이 보냅니다. 과연 무슨 일인지 정민님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 2026년 서울시 북스타트 엄마북돋움 사업에 책 '썬데이 파더스 클럽'이 후보에 올랐습니다. 아직 도서 추천 투표에 참여하지 않으셨다면 잠시만 시간내서 꼭 투표 부탁드릴게요. 서울시의 많은 양육자들에게 저희 책이 전달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

1.

기상관측 이래 가장 덥다는 7월을 지나는 중이다. 출근길에 현관문을 열면 습하고 더운 공기가 금세 훅 몸을 감싼다. 순간 불쾌감이 올라오지만, 그래도 인생은 낙관적인 태도로 살아야 하지 않겠나.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던 드라마 <미지의 서울> 속 미지의 말처럼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굳이 좋은 점을 하나 찾아보려고 주변을 두리번 둘러본다. 아파트 단지는 이미 대낮같이 밝다. 나무들이 저마다 건강한 녹색 이파리를 뽐낸다. 겨울이었다면 여전히 춥고 어둑하고 앙상했을 테다. '그래, 더워도 깜깜한 것보단 밝은 것이 낫지…'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회사로 가는 버스를 탄다. 평소보다 조금 늦었지만 그래도 아직 7시 전이다. 십여 분 차이로 조조할인을 못 받아서 슬쩍 아쉽다. 

회사에 도착해서 정신없이 이런 저런 일들을 처리하다 보면 어느덧 저녁이 찾아온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지하철을 먼저 타고, 중간에 신촌이나 홍대입구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탄다. 예전보다는 한산해졌다지만, 그래도 신촌에는 여전히 이십대의 젊음이 넘친다. 공항철도와 경의선 숲길이 생긴 이후의 홍대는 말할 것도 없다. 

대학생들 사이에 섞여 일부러 한 정거장 정도 더 걷는다. 열기는 여전하지만 그래도 그 사이로 간간히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서 걸을 만 하다. 이렇게나마 몸을 움직여야 운동이 되지 하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해본다. 마음은 이십대일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데, 몸은 그때보다 이십 킬로 가까이 늘었다. 

졸업 이후에 대체 뭘 해야 하나 종종거리던 이십대 시절, 마흔은 감히 상상도 잘 안되는 어마어마한 어른의 나이였다. 명동 어디쯤이었을까? 비영리단체 행사에 대학생 자원봉사자로 일손을 돕다 행사를 주관하던 어른들과 저녁을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 그 중 한 분이 젓가락질을 하며 아직 스물 두엇 밖에 안된 우리들에게 물었다.

“꿈이 뭐에요? 나중에 졸업하면 무슨 일을 하고 싶어요?”

뭐라고 답을 했더라. 한창 학자나 외교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을 때니 비슷한 대답을 하지 않았으려나 싶은데, 정확히 기억이 안난다. 오히려 또렷한 건 그분의 다음 말이었다. 

“실은… 나도 잘 몰라요. 서른 넘고 마흔 넘으면 뭔가 확실히 자기 꿈이 있을 것 같죠? 그런데 서른 넘어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마흔 넘으면 좀더 확고해질 줄 알았는데, 뒤돌아보니 벌써 마흔을 훌쩍 넘었더라니까?”

이십 년 전 그 순간 느꼈던 낭패감은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다. '뭐야, 삶이라는 게 마흔이 넘어도 똑같은 거야?' '그래도 직장에 들어가고, 커리어를 십 년 넘게 쌓다 보면 자취방과 원룸을 전전하는 지금보다는 낫겠지 싶었는데, 그때도 똑같다고…? 설마.' 쉽사리 믿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궁금했다. 정말 마흔이 지나도 비슷한 걸까.

2.

아이들은 너무 덥다고 한주 내내 성화였다. 둘째는 토요일이 되자마자 선언했다. 

“아빠, 오늘 저녁에 나랑 갈 데가 있어.”
“...?”
“수영장 가야돼. 무조건 수영장 갈 거야!”

6월 하순부터 한강 야외수영장과 물놀이장이 개장했다.* 둘째가 가고 싶은 곳은 정확히 말하자면 수영장이 아니라 물놀이장이다. 지난 주에 친구와 처음 가봤는데 꽤나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이번에는 꼭 아빠와 가고 싶단다. 사실은 주말에 엄마가 바쁘니 꿩 대신 닭이라는 심정으로 말한 거라는 걸 뻔히 알지만 기꺼이 속아준다.

* 2025년 6월 20일부터 8월 31일까지 운영한다. 뚝섬·여의도·잠원 수영장, 잠실·난지·양화 물놀이장 총 여섯 곳이다.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운영하며, (물놀이장 기준) 어른은 3천원, 어린이는 1천원이다. 다둥이 카드 지참 시 50% 할인 가능하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점에 가선지 생각보다 사람이 많진 않았다. 둘이서 누가 오래 숨 참는지 잠수 시합도 하고, 수상스키처럼 이리저리 끌어주며 두어 시간을 보냈다. 

슬슬 출출해질 즈음 꼭 먹어야 하는 게 있다며 아이가 손을 잡아끌었다. 물놀이장 위쪽에서 간단한 간식거리들을 팔고 있었다. 그래, 한강에 왔으면 한강 라면 한그릇은 먹어 줘야지. 비치 타월을 어깨에 두른 채 라면을 먹는데 둘째가 갑자기 할 말이 있단다. 

“아빠 사실, 나 변호사 안 하기로 했어.”
“너 변호사가 꿈이었어? 변호사가 뭐하는 건 줄은 알아?”
“어, 알아. 법원에서 판결하는 거잖아(?) 실은 1학년 여름부터 꿈이었는데 안 하려고…”
“왜?”
“변호사 되면 다 줄임말로 부르는데, 나는 배씨니까 ‘배변’ 되잖아. 배변은 똥이잖아. 그래서 싫어.”

딸은 아이돌 스타나 메이크업, 헤어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고 했지,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한 적은 그동안 한 번도 없었다. 뭐지 이 당황스러움은. 뭐라고 말을 해줘야 하지? 명색이 양육자고 어른인데, 그래도 뭐라도 한마디 ‘평생 기억에 남을 만한 말’ 한마디 해주는 멋진 아빠가 될 수 있으면 좋을텐데…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웅얼웅얼대다 결국 입에선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다 먹었지? 옷 젖어서 춥다, 집에 가자.”

3.

다시 월요일이 되어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고, 지하철을 타고 퇴근을 한다. 성실하게, 늦지 않게, '월화수목금' 동안 정해진 루틴을 반복한다. 출근할 때나 퇴근할 때나 7월 여름 햇빛은 여전히 따갑기만 하다. 

이상하게 한주 내내 둘째가 한 말이 머리를 맴돈다. 역시 아이라 똥이 싫긴 싫은가보다 하고 혼자 풉 웃기도 하고, 그러다가 아이에게 딱히 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는 스스로가 좀 멋쩍어지기도 한다. 

아이의 미래는 그야말로 미지의 세계, 아이가 어떤 존재로 자라날지 나는 결코 알 수가 없다. AI가 더 발전할 수십 년 후에 과연 우리가 지금 떠올리는 일자리들이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소설가 김영하는 에세이 <단 한 번의 삶>에서 유한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아마도 모친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을 것만 같은 이 에세이를 읽다 보면, 누구에게나 한 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에 대해 여러가지 갈래로 생각이 뻗어난다. 

작가의 글들 중 가장 가슴에 와닿은 구절은 삶을 ‘칵테일’에 비유한 부분이었다. 

‘지금 이 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것과 스스로 결정한 것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유일무이한 칵테일이며 내가 바로 이 인생 칵테일의 제조자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 삶을 잘 완성할 책임이 있다.’
- 김영하, <단 한 번의 삶>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라는 걸 나이를 먹어갈수록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도 돌이켜보면 또 이따금씩은 선물같이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던 적도 있었다. 그것도 기대를 거두었을 무렵, 마치 영화처럼.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꿈에 대해 뭐라 말해주기가 여전히 조심스럽다. '넌 뭐든 될 수 있어!' 라고 말하면 그건 아무래도 인생에서의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르는 것만 같다. 살아보니 차마 그렇게는 말해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야 인생 별거 없어, 너가 원하는 대로 안될 가능성이 더 높으니 원하면 더 ‘노오력’을 해' 이렇게 말해주고 싶지도 않다. 설사 그게 더 진실에 가깝다고 해도. 

야근을 하고 집에 들어왔더니 아이는 기다리다 결국 곤히 잠들어 있다. 아이들은 잠잘 때가 가장 예쁘다는 건 역시 진리다. 쌕쌕 자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조용히 말해주었다. 

"은아, 사실 아빠도 뭐가 되고 싶은지 잘 몰라. 지금까지도 잘 몰랐고, 앞으로도 잘 모를 거야. 그래서 네게도 뭐가 되어라 이런 말 해주고 싶지 않아. 앞으로도 네 꿈을 찾아라 이런 말은 안 할 거야. 

배변이 되든 케이팝 스타가 되든 다른 뭐가 되든 괜찮을거야. 그런데 그 과정에 꽤나 고통이 따르긴 할꺼야. 네가 숙제를 다 하기 전까지는 좋아하는 뜨개질을 못하듯, 삶에서 뭔가를 성취하려면 그에 못잖은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더라고. 그래서, 아빠는 그 과정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너무 애달플 것 같아서 뭐라고 차마 말을 못하겠네."

"대신, 한가지 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빠도 포기는 안할게. 지금까지 사십 년 넘게 살면서 이런 저런 결정을 했어. 후회스러운 일도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돌이켜보면 적어도 뒤섞었을 때 똥맛은 아니었던 것 같아. 물론 최고의 칵테일은 아닐 가능성이 높고, 완성했을 때 무슨 맛이 나올 지 여전히 잘 모르지만, 아빠도 계속 이런 저런 조합으로 아빠만의 칵테일을 만들어 볼게. 너도 계속 너만의 칵테일을 잘 만들어 보길."

4.

다음 날 아침, 딸아이가 일어나 무심한 표정으로 한 마디 던진다. 

“아빠, 나 진짜 하고 싶은 거 생겼어.”
“뭔데?”
“백수!”
“…(두뇌 정지)”

양육자는 극한 직업이다. 

Fathers’ Update

지난 레터(143화 육아휴직의 끄트머리)에 보내주신 답장을 소개할게요. 고맙습니다.

💬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과 손해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나서 되돌아보면 아마 더 분명해질 것이라 믿습니다. 복직도 파이팅입니다. (초록테이블)

님, 오늘 보내드린 편지는 어땠나요? 썬데이 파더스 클럽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제안/피드백/질문이있다면 아래 링크를 통해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