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안녕하세요, 님. 어느덧 막바지 추위가 물러나고 한결 따뜻해졌네요. 한동안 잿빛이던 나무와 풀도 초록을 뿜어내고요. 무엇보다 아이들이 두꺼운 외투를 벗어던지고 가볍게 뛰어놀 수 있어 참 반가운 계절입니다. 슬리퍼를 꺼내 신게 되면서 이제 더 이상 굴러다니는 아이들 양말 치울 일이 줄어든건 덤이지요. 이번 편지는 육아휴직 중인 세 아들 아빠 정우님이 보냅니다.

주말 오전 옥수동으로 향하는 택시 안. 보통 때 같으면 선택을 주저했을 교통수단이지만 어째서인지 나와 첫째 아이는 택시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있다. 아이들로 가득 찼을 뒷좌석에 승객은 우리 둘 뿐이다. 다시, 보통이라면 눈을 떼지 못했을 미터기는 보지도 않고 연신 시계를 본다.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지하철을 타려던 계획을 바꿔야 했다. 택시는 급출발과 급제동을 반복했다. 전기차 특유의 회생제동을 위한 큰그림인가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이 택시는 전기차가 아니었다. 예매한 기차표를 취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옥수역에 도착했다. 포기하고 천천히 승강장에 올라갔다. 다행히 기차가 그 자리에 있었다. 청춘이라고 하기에 아직은 아이 같기만 한 아이와 이제는 청춘이라고 불리기에 민망한 아이의 아빠는 그렇게 춘천으로 향하는 itx 청춘 열차에 올랐다.

외동을 둔 친구는 '아이에게 친구를 만들어주는 게 일'이라고 했다. 아니, 친구를 만들어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아이를 사회적인 관계에 더 많이 노출을 시키려고 노력한단다. 어쩔 땐 아이의 하나뿐인 친구가 부모 자신이 되기도 한다. 나로서는 ‘그럴 수만 있다면’ 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럴 수도 있겠군’ 싶은 생각이 든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이들과 따로따로 시간을 보낸 게 언제인지 생각해본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집 앞 편의점에 갈 때도 웬만하면 다 같이 가니까. 다시 때가 됐다. 아이들과 따로 외동타임을 보낼 때가.

열차에 오른 첫째 아이는 누가 봐도 들떠있다. 하마터면 기차를 놓칠 뻔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하이파이브를 했다. 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아이들에게 몰래 스마트폰 게임을 시켜주다 아내에게 몇 번 걸렸다. 아이에게는 이번 여행에서는 게임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미리 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갖고 온 책은 게임 해설집이었다. 아이는 책이 금세 지루해졌는지 책을 덮는다. 나는 내가 읽던 책을 내려놓고 아이가 읽던 책*을 집었다.

* Mojang AB, 마인크래프트 레전드 가이드, 이주안 옮김, 영진닷컴, 2023

“보통 사악해서는 사냥의 무리의 정예 요원이 될 수 없습니다. OOO는 무장한 몬스터로, 파괴적인 위력을 지닌 레킹볼로 변신하..”

“피그마딜로”

“?”

“모든 피글린 기지와 일부 전초 기지에서는 OOO라고 하는 독특한 구조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장치는 주변 땅을 유독한 황무지로 만드는 독을 방출하여..”

“네더 전파 장치”

“??”

“OOO은 화창한 평원을 좋아하고 마을 주변의 언덕을 뛰어다닙니다.”

“… 토끼?”

“???”

고작 일주일에 두세 번, 한 번에 한 시간만 게임이 허락된 아이가 과연 맞출 수 있는 퀴즈일까 의심했지만 기우였다. 나는 신나서 문제를 냈고 아이는 신나게 정답을 맞췄다. 기차는 금세 서울을 벗어나 가평을 지났다. 아이와 이야기하는 도중에 간식을 꺼내려고 말했다. “잠깐만”. 그러고보니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항상 하게 되는 말이 “잠깐만”이거나 “조금 이따가”였다. 한 아이와의 대화는 다른 아이의 대화(혹은 그 외의 모든 것으)로 중단되기 일쑤였다. 아이와 이렇게 오래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대화가 가능하다는 게 놀라웠다.

우리는 그렇게 하루를 춘천의 한 놀이동산에서 보냈다. 연간회원권 할인 소식 때문인지 인파가 굉장했다. 어딜 가나 줄 서느라 생각만큼 놀이기구를 많이 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롤러코스터는 두 번 탈 수 있었다. 아이스크림도 세 개를 사야되면 망설였겠지만 하나만 사면되니 군것질도 원없이 했다. 재미없다고 할 줄 알았던 전망대 위에서도 아이는 즐거워했다. 회전컵 놀이기구에서 아이가 가느다란 팔로 컵을 힘차게 돌려대는 통에 멀미가 났다. 사행성이 다분해보이는 ‘오리인형 건져서 인형 따기’ 놀이는 3번이나 했고 다행히 그 정도 금액일것만 같은 인형을 손에 넣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춘천역 앞에서 닭갈비를 먹었고 기차에 올라 잠이 들었다. 옥수역에서 집으로 갈 때는 지하철을 탔다. 아무래도 택시는 인원이 많을 때 타(거나 늑장을 부렸을 때 타)야 가성비가 아쉽지 않다. 그러고보니 아이와 기차를 탄 것도 처음이다. 여태 여행은 자가용이 더 저렴하기도 하고 편리하기 때문에 기차는 탈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내 입장에선 남이 운전해주는 교통수단을 타는 게 너무나도 환상적이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아이들은 아직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 아이들이 자전거를 탈 공간도 마땅치 않고 자전거를 세 대나 구비할 생각을 하면 경제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부담이 된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이가 셋일 때는 뭔가 원활하지 못한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다. 한 아이와의 대화가 끊기지 않고 오래 지속되기 어렵듯이 자전거 타기도 그렇지 않을까 하고 지레 겁을 먹었다. “잠깐만”이나 “조금 이따가”라는 말로 나의 게으름을 가리는 건 아닐까? 더 부지런 해져야겠다. 어쩌면 아빠와 아들, 단 둘이 있는 걸 허락해 준 건 내가 아니라 아이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는 커다란 인형을 안고 위풍당당하게 집에 들어섰다. 동생들은 부러운 눈으로 인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두 번 더 남았군, 외동 타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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