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1.

최근 한두 달 새 첫째의 화와 짜증이 늘었다. 걸핏하면 화를 냈다. 얼마나 걸핏이냐 하면, 아내가 옥수수를 쪄서 아이에게 주려는데 너무 뜨겁다고 하니 반으로 잘랐다. 그런데 아이가 갑자기 ‘왜 반을 자르냐’며 화를 내는 거다. 그런데 또 얼마나 화를 내냐고 한다면 ‘화가 나!’라고 목청이 터져라 소리치면서 발을 세게 구르고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친다. 

우리 부부에게는 이런 장면이 무척이나 충격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아이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건 본 적이 없었다. 평소에는 화를 내지 않는 편에 가깝고 혼자서도 집에서 잘 노는 편이었다. 또래 친구들에 비해 ‘파괴왕’의 면모도 잘 보이지 않는다. 살가운 표현을 잘하고 사랑한다는 표현도 잘해서 어린이집 담임 선생님이 ‘제가 이서에게 받은 게 많아요’라며 졸업식에서는 손수 목도리를 짜주시기도 할 정도였다. 

그런 아이가 180도 변한 거다. 불과 몇 달 새에. 왜일까. 아내와 나는 안다. 아이에게는 잘못이 없음을. '금쪽상담소'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같은 TV 프로그램을 보면 문제행동을 일으키는 아이들의 원인은 99.9% 부모나 환경에 있다. 그래서 아이 입장에서 생각해보기로 했다. 과연 무엇이 아이를 걸핏하면 화를 내도록 만들었을까.

2.

작년 10월 둘째 아이가 생겼다. 두 달 뒤인 12월, 남양주에서 서울로 이사를 나왔다. 그리고 봄이 되었다. 크고 작은 삶의 변화들이 있었지만, 대단해할 것도 없는 나날들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하지만 첫째 아이는 이서에게는 좀 달랐을 것이다. 

동생이 생겼다는 건 자신에게 전해지던 부모의 관심이 절반으로 줄었다는 이야기다. ‘여기 좀 보세요’라고 하면 적어도 아내나 나 둘 중 하나는 즉각적으로 반응해 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좀 다르다. 첫째가 우리를 불러도 보통 한 명은 집안일을 하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둘째를 보고 있다. 그러니 늘 ‘응 잠깐만 기다려줘’라고 하기 일쑤다. 첫째 입장에서는 이런 상황들이 낯설고 서운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을 거다. 

남양주에서 서울로 온 것도 큰 변화다. 아이의 어린이집 학기가 진행 중이던 와중에 이사를 왔으니 새로운 어린이 집에 적응하는 것도, 기존 어린이집과 이별을 하는 상황도 익숙하지 않았을 거다. 거기에 더해 할머니, 할아버지의 품을 떠나야 했다. 평소 같으면 아침 일찍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가서 아침을 먹고 10시가 다 되어서야 등원했다. 그리고 4시면 칼같이 하원을 하고 근처를 다녔다. 날이 좋으면 대성리에 가서 꽃 구경을 하기도 하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마트에 가서 장도 보고 구경도 했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샤워까지 깨끗이 하고 집에 돌아오던 일상이었다. 그런데 이사를 오고 난 뒤에는 그런 보살핌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하원 뒤에도 엄마와 동생과 집에만 있어야 하는 나날들이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봄이 되었다. 3개월쯤 다닌 새로운 어린이집에 적응하려나 했는데 이제는 유치원에 다녀야 하는 상황이 된 거다. 한 반에 7~8명 정도 있던 어린이집과 달리 유치원은 한 반의 정원이 25명이다. 새로운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적응도 해야 하고 새로운 공간, 새로운 선생님 그리고 새로운 규율에 적응해야 한다. 게다가 등원 시간은 1시간 이상 빨라졌고 하원은 1시간 이상 늦어졌다. 등원도 하원도 모두 유치원 버스로 하다 보니 이동시간도 더해진다. 낮잠 시간도 없어졌다. 거기에 더해 하원 뒤에는 주 1회 방문 선생님과 50분 간 한글 공부를 했고 주 2회 영어 화상 수업도 20분씩 진행했었다. 피곤해서인지 몸과 마음이 지친 아이는 쉬이 집중하지 못했다.

아이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보니 도대체 이게 뭔가 싶었다. 동생이 태어난 것도, 이사를 하는 것도, 유치원에 가는 것도 아이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부모의 결정에 이리저리 끌려다닌 것만 같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솟구쳐 올랐다. 혹시 몰라 유치원에 물어보니 원에서는 규율도 잘 지키려고 하고 솔선수범하는 편이라고 했다. 친구들에게 화를 내는 일은 더더욱 없다고 했다. 집에서도 동생에게 심술 한번 낸 적 없다. 

그러니 집에서 우리 부부에게 그리 짜증과 화를 냈나 싶었다.

3.

하루 종일 규율을 지키며 공부한 아이에게 집에 와서 또 공부를 시켰던 걸 생각해 보니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다. 영어 공부는 내 욕심이 어느 정도 있었고 한글 공부는 육아휴직을 내고 하루 종일 둘째를 육아하는 아내의 휴식 시간 같은 개념도 포함되었다. 하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결코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한창 에너지를 발산할 5살 남자아이에게 매일 오후 집에만 있어야 하는 일상은 매우 답답했으리라..

모든 걸 내려놓고 아이만 생각하기로 했다. 하원 후에 하던 한글 수업과 영어 수업은 모두 취소했다. 그리고 매일 직접 하원을 하기로 했다. 유치원 바로 앞에는 놀이터가 있다. 한 번씩 아이 하원을 할 때면 늘 놀이터에서 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평소에는 유치원 버스를 타고 정해진 시간에 하원해야 하기에 놀 수 없던 공간. 내가 하원을 시키기로 한 뒤로는 매일 놀이터에서 1시간 동안 놀다가 집에 온다. 모래놀이도 하고 친구들과 뛰어놀기도 하고 나뭇가지를 주워 칼싸움 하는 시늉을 하기도 하고 혼자서 노래하고 춤을 추기도 한다. 비가 오는 날에도 장화를 신기고 우의를 입혀 놀기도 했다. 

주말에는 동네 산 초입에 갔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지만 우산도 쓰고 장화도 신고 나섰다. 산 초입에 있는 얕은 개울가에 들어가기도 하고, 숲 놀이터에서 돌도 쌓고 장애물에 매달리기도 했다. 비 때문에 1시간 만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역시나 아이의 기분은 좋아 보였다.

4.

직접 하원을 하고 놀이터에서 놀린 지 2주가 되었다. 그 뒤로도 아이가 화를 낼 때가 있지만 강도나 빈도가 확연히 줄었다. 아내와 종종 '우리 이서가 돌아왔다'고 이야기 한다. 매일의 스트레스를 놀이터에서 풀어낸 덕이 아닌가 싶다. 당분간은 지금처럼 직접 하원을 시키고 흙바닥에서 뛰어노는 시간을 많이 주려고 한다. 이제 날도 풀렸으니, 주말에는 집 근처 산도 더 자주 찾으려고 한다. 

아이는 정직하다. 하얀 도화지 같다. 자신에게 오는 인풋(input)을 그대로 아웃풋(output)으로 내보낸다. 아이에게 어떤 인풋을 줄 것인가는 오롯이 부모의 몫이다. 너무 많은 인풋을 주기보다는 아이가 소화할 수 있는 만큼의, 소화할 수 있는 종류의 인풋을 줘야 한다는 진리를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아웃풋은 아이의 몫일 테니 우리 부부는 앞으로 인풋에 집중하려 한다. 동생이 생겨버린, 원치 않은 소속 변화를 2번이나 겪어야 했던, 자신을 바라보던 어른이 4명에서 0.5명으로 변해버린 아이에게 지금 줘야 할 인풋은 적어도 공부는 아닌 것 같다.

아이에게 '뭣이 중헌지' 앞으로도 차분히 고민해 봐야겠다.

Fathers’ Up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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