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0시 51분. 아내에게 문자가 왔다.

“탄핵(심판) 선고일, 금요일로 정해졌대요. OOO에서 연락 왔어요.”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사무실에서 헌법재판소가 잘 보인다. 뉴스 통신사 OOO에서 선고일이 가까워지자 현장 중계를 위해 적절한 장소를 찾다가 우연히 사무실을 방문했다. 기자는 명함을 건네며 촬영 협조를 구할 수 있을지 물었고, 선고일이 정해지면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다. 지난 3월의 일이다. (결과적으로 이곳에서 촬영은 하지 않았다.)

유치원 단톡방도 바빠졌다. 헌법재판소(이하 헌재)와 가까운 곳에 있다 보니 선고일 당일과 전날은 휴원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부터 예고해 왔었다. 몇 번의 시뮬레이션이 있긴 했지만, 날짜가 정해지니 아이를 돌보는 일과 생계를 위한 일 외에도 조율할 게 은근히 많았다.

“그럼 저희는 목, 금 휴원인가요?”

어느 학부모의 물음에 유치원 원장은 “협의 중입니다”라는 짧은 답을 남겼다. 잠시 후 원장은 다음 날 봄소풍(체험학습)부터 취소한다고 안내했다. 그는 “학교 앞 위험상황과 도로통제로 부득이하게 체험을 취소합니다. 아이들의 실망이 클 것 같아 너무 미안한 마음입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날 오후 2시 50분, 유치원 임시 휴업을 안내하는 가정통신문이 왔다.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휴원.

바깥에서 들리는 시위대의 소음이 더 커진 느낌이었다. 정오부터 안국역의 일부 출입구는 폐쇄됐다. 이미 연초부터 경찰서 등 유관기관은 시위대의 예측 불가능한 돌발상황에 대비해 헌재 주변으로 차벽을 설치하고 있었다. 선고일이 공개된 뒤로, 그 차벽은 더 촘촘해지고 있었다. 이 정도면 전국의 모든 경찰버스들이 동원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모든 경찰 병력이 한 곳에 집결되었다가 함정에 빠지는 장면도 떠올랐다. 이대로 괜찮을까.

헌재가 선고를 준비하고 시위대가 시위를 하는 동안, 나는 아이를 유치원에서 데려와야 했다. 마침 화요일마다 송이가 듣는 수업이 있는데, 이날부터 교통통제가 심해서 자가용을 쓰기 어려워 보였다. 유치원 정문이 사실상 막혀 있어 후문으로 나왔다.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았다. 어쩌다 잡힌 택시도 안국역 사거리 부근에서 도로가 꽉 막혔다며 호출을 두 번이나 취소했다. 송이와 돈화문로로 걸어갔다. 택시를 잡았다. 후암동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30분 지각.

수업을 마치고 택시를 타고 동네로 돌아왔다. 집으로 가는 길목이 닫히기 직전이었던 것 같다. 다른 경찰버스 2대가 주차를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송이와 집 앞에 내렸다. 순찰 중인 경찰기동대 무리에게 물었다.

“혹시 여기 길목도 곧 막히나요?”
“실은 저희도 잘 모릅니다. 통제 구역은 대외비입니다.”

송이가 나에게 ‘대외비’가 뭐냐고 물었는데 제대로 답했는지 모르겠다. 우리 일단 저녁부터 먹자. 아내가 사둔 밀키트를 데우면서 밀린 설거지를 했다. 맥주잔으로 애용하던 얇은 두께의 유리컵을 씻고 싱크대에서 꺼냈는데… 손에서 미끄러졌다. 유리컵이 상판에 한 번 부딪혔고 나머지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와장창 깨졌다. 유리 조각 중 하나가 내 발등을 스치며 베었는지 피가 조금 흘렀다. 다행히 조각이 박히진 않았다.

“송이야, 이쪽으로 오지 마. 여기 정리 좀 할게.”

장갑을 끼고 유리 파편을 줍고 바닥을 물걸레로 훔치는 동안 아내가 퇴근했다. 아내는 다음날 봄소풍 도시락으로 준비한 김밥 재료들을 꺼내 쓱쓱 김밥을 말고 여러 크기로 잘랐다. 작은 김밥들은 송이 입으로, 큰 김밥들은 아내와 내 입으로 들어갔다. 소풍 장소에서 먹었으면 더 꿀맛이었을 텐데.

수목금토일. 하나둘셋넷다섯. 5일 정도 각자의 본가(둘 다 서울 양천구에 있다)에 나누어 머물 수 있을까, 생각하며 5일치 속옷을 챙겼다. 아내는 중요한 팀 회의가 있어 내일까지는 출근하고, 수요일 저녁에 친정으로 가겠다고 했다. 

송이를 차에 태우고 시동을 걸었다. 밤 9시 55분, 송이에게는 ‘밤할머니’도 왔다 간 늦은 시각이다. 평소 다니던 길 반대편으로 돌아가 북촌한옥마을을 지나니 내비게이션은 헌법재판소 앞 교차로에서 우회전하라고 했다. 차는 경복궁의 돌담 앞에서 또 우회했다. 대통령 없는 청와대 쪽으로 돌아 사직로에 올라탔다. 금화터널을 지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전에 아내의 문자를 받고 난 직후부터 하루가 어찌 흘렀는지 모르겠다. 밤 10시 반 무렵, 부모님 댁에 도착했고 차에서 잠든 송이를 안방의 이부자리로 옮겼다. 새벽에 깨어난 송이는 엄마가 보고 싶다며 짧게 울다가 잠들었다.

지난 레터(130화 엄마 이야기)에 보내주신 답장을 소개할게요. 고맙습니다.

💬 외근이 많은 일 특성상 커피숍에서 메일을 열어볼 때가 많은데 규성님 이야기에 눈물 쏟아내고 사연녀 될 뻔한 극F 성향의 애독자입니다. 저희 시아버님이 몇개월 전에 돌아가셨는데, 남편이 그렇게 우는 걸 결혼하고 처음 봤어요. 사실 남편이 시아버님과 썩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고, 오히려 남편은 항상 아버님께 못마땅한 부분이 있었는데 아버님이 편찮아지신 이후에 자책과 후회가 섞인 이야기를 종종 하는 걸 보면서 부모가 가지는 무게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부모가 되겠다는 결심이 무색하게 어제도 아이들 숙제 때문에 어마어마한 잔소리를 쏟아냈지만, 그 단편들조차 아이들에게는 겹겹이 쌓여 엄마라는 내 존재에 대해 흔적이 남을거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지네요. 날씨가 따뜻해지니까… 다시 운동을 시작해야겠어요. 아무튼 우리는 아프면 안되는 존재들이니까요. (슈퍼송이)

Illustration by 김파카(@kimpa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