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님 안녕하세요. 경상도 지역 화재로 인해 많은 분들이 힘드셨을 지난 한주입니다. 모쪼록 남은 불이 빠르게 진화되고 조속히 피해가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번 편지는 슬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왠만해서는 울지 않는 규성님의 조금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전합니다.

1.

일찍 잠든 아이 덕에 저녁이 있던 일요일 밤. 아내와 드라마를 같이 보던 중에 극 중 생을 마감한 엄마가 회상 장면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나왔다. 아내는 식탁 위에 놓인 각 티슈를 한 장 두 장 뽑더니 이윽고 눈가에서 물기 하나 느껴지지 않는 나를 쳐다봤다. 나는 이미 아내의 눈빛만 봐도 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만, 아내는 친절하게 자기 생각을 한 번 더 표현해줬다.

“(훌쩍훌쩍) 여보는 안 슬퍼? 어떻게 안 울 수가 있어..” 

나는 속으로 말했다.

내가 안 슬픈 게 아니라 드라마가 날 못 울린 거라고.

에피소드 몇 편을 내리 정주행했을 때쯤이었을까. 이번엔 엄마가 아닌 어린아이가 생을 마감하는 장면이 나왔다. 아내가 다시 휴지를 찾으려는 순간 나는 빠르게 장면을 뒤로 넘겼다. 아내는 의아한 (= 찔러도 눈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사람이 하는 행동치고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다시 쳐다봤다. 오랜만에 찾아온 기회였다. FFFF인 아내에게 나 또한 F가 숨어 있음을 어필할 수 있는 기회.  

“그냥.. 볼 자신이 없어. 아빠가 된 이후 이런 장면은 못 보겠어 이제.” 

주말이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고 찾아온 길고 긴 평일의 중턱. 기억에서 좀처럼 잊히지 않는 그날은 아내의 회식 날이었다. 어린이집까지 빨라야 한 시간 늦으면 두 시간 걸리는 위치에서 퇴근을 해야 해서 하원을 위해 일찌감치 오후 반차를 내고 강남역 일대를 5시 전에 빠져나가기 위해 운전석에서 발을 동동거리고 있을 때였다. 빨간색 가득한 내비게이션 화면 위로 친숙한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대학교 동아리 후배한테서 온 카톡 알림이었다. 이름과 함께 몇 가지 단어가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나는 통화하기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 잊고 있던 존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빠, 시간도 꽤 지났고 또 아픈 이야기라 좀 그런데,

혹시 어머니 편찮으실 때 어떻게 견디셨어요?”

후배는 어렵게 말을 꺼냈고, 나는 어렵게 기억을 꺼냈다. 

2.

팀 사람들과 점심을 먹고 자리로 돌아와 카톡에 쌓인 광고 알림들을 하나둘 지워가는데 고등학교 동창의 어머니이자 내 보험을 담당하고 계신 아주머니로부터 카톡이 와 있었다. 내용은 종신보험이 완납되었으니 보험사에서 제공하는 축하 선물을 고르라는 것이었다.

고3 때 엄마는 정작 나는 잘 어울리지 않는 같은 반 친구의 어머니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 중 한 명이 보험설계사이셨고, 당시나 지금이나 크게 느껴지는 월 16만 원 20년 납의 종신보험 상품을 대학교 입학시기에 맞춰 흔쾌히 들어주신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친하지도 않은 친구의 어머니와 20년 동안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아야 했고, 엄마의 부재 이후엔 더더욱 그랬다. 

그나저나 20년이라니.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은 완납이라니. 엄마가 낸 6년에 이어 14년을 스스로 경제활동을 하며 빠짐없이 냈다는 보람도 잠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그 보험료는 나에게 쌓이는 돈이었지만 엄마를 위해 쌓는 돈이기도 했다. 죽은 사람의 체면을 위해 내가 쌓은 돈. 한 번도 내가 내겠다고 말한 적도, 약속한 적도 없지만, 약속을 지키듯이 내왔던 돈. 내가 누군가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아나가는 것처럼 냈던 돈이었다. 

그래서 분명 축하선물을 받을만한 완납이지만 선뜻 받고 싶지만은 않았다. 3년 만에 온 아주머니의 카톡에도 바로 답장을 못하고 고민만 하다가 결국 아무 답을 못했다. 완납을 누구보다 기뻐할 사람은 도대체 어디 간 건지, 도대체 20년 전 막내아들의 뭐가 불안했길래 이렇게 큰돈을 보험에 붓기 시작했는지, 정작 왜 본인의 건강에 대해선 불안이 없었는지, 답을 받을 수 없는 질문만 끝없이 하면서 답장하지 못했다.  

3.

퇴근길에 연락이 왔던 동아리 후배는 몇 주 만에 부고장을 보내왔다. 나에게 첫 연락을 해왔을 땐 이미 아버지 병세가 많이 악화되셨던 상황이었던 것 같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후배의 얼굴은 의외로 밝아 보였다. 이미 마음고생과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한 것 같은, 부모 중 한 명이 죽어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이미 경험한 사람 같았다. 

생각해보니 후배는 통화할 때부터 과거의 나보다 훨씬 어른 같은 태도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리 누군가에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고민을 많이 한 사람이라는 걸 의미하는 것이리라. 후배의 모습은 스스로 견딜 수 있는 척, 강인한 척하는 가짜 어른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 성숙한 사람 앞에서 나는 마치 대단한 경험자인 것처럼 최대한 지금의 시간을 같이 잘 보내고 기억해두라는 뻔한 말을 통화로 했었다.

14년 전의 나는 과연 잘 견뎠던 걸까. 그때의 나는 과연 지금의 후배보다 덜 힘들었을까. 오히려 그때부터 지금까지 연약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써서 감정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클 기회를 놓친 건 아닐까. 그래서 엄마 이야기를 그리는 슬픈 드라마 앞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는, 눈물 한 방울 흘릴 능력도 없는 약한 어른이 된 건 아닐까. 

일상에 허덕이다 보면 눈앞의 시간이 무한하고 인생에 끝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다 누군가의 부고를 접하거나 누군가의 죽음을 가까이서 보다 보면 내 가족의 시간은 물론이고 내가 가진 시간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한다. 그러고는 가족이 제일 소중하다는 뻔한 말이 전혀 뻔하지 않다는 것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 

아빠가 되고 나서 엄마가 그리울 때가 종종 있다. 육아휴직을 하며 혼자 하는 육아와 가사노동이 막막했을 때, 아이가 내가 어릴 때 좋아하던 걸 똑같이 좋아했을 때, 아이의 모습을 보며 장모님과 아내가 아내의 어릴 적 이야기를 할 때, 아이와 자기 전에 그리고 자고 일어나서 스킨십을 하며 말로 못할 원초적 기쁨을 느낄 때, 나로부터 그런 기쁨을 느꼈을, 내 어릴 적 모습을 누구보다 촘촘하게 기억하고 있을 엄마의 존재가 가끔 그립다. 

자녀에게 부모란 뭘까. 지금은 먹을 음식, 입을 옷, 잠잘 곳, 새로운 경험 등을 마련해주는 육아와 보육 그리고 교육 등이 전부인 것 같지만, 성장기 이후엔 그냥 그 자리에 건강하게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도 역할을 다하는 게 아닐까. 

부모의 존재를 잊고 살 정도로 바쁘다가도 가끔 궁금하면 연락을 받아주는 존재, 손자와 손녀 앞에서 엄마아빠 본인은 기억도 못 하는 과거를 전래동화 이야기하듯이 재밌게 말해주는 존재, 너무나 절박하고 막막할 때 가장 쉽게 질문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존재, 힘든 순간 최후로 나를 받아줄 수 있는 존재. 모두 특별한 능력 없이도 살아만 있다면 할 수 있는 역할이다.   

하지만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건강하게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것은 말이다. 생명을 유지한다는 건, 명 앞에 붙은 ‘생’을 유지한다는 건 생각보다 노력이 필요한 일이란 걸 나이가 들수록 느낀다. 

이번 한 주만큼은 아내와 아이와의 희소한 시간을 순간순간 더 잘 보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일 분이 넘는 통화를 해본 적이 없는, 아버지에게도 전화를 더 자주 드려야겠다. 그리고 드라마의 남은 에피소드를 보면서 또 슬픈 장면이 나오면 아내한테 글을 쓰다 떠오른 좋은 명분을 말해보려 한다. 사람에겐 울음 총량의 법칙이 있다고. 난 이미 어른 때 울 수 있는 양을 20대에 다 울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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