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안녕하세요, 님. 이번 편지는 육아휴직 중인 정우님이 보냅니다. 아이들과 짧게 다녀온 여행에서 아이들에게 새로운 걸 가르쳐주기도 하고 거꾸로 아이들로부터 새로운 걸 배우기도 했다는데요. 님은 아이가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어서 놀랐던 적이 있나요? 아이에게 배우는 건 또 어떤 게 있나요? 

📍혁진님과 현님이 KBS 1라디오에서 육아와 저출산에 대해 이야기 하고 왔어요. 어떤 내용일지 궁금한 분들은 한번 확인해보세요 ^^

성을 지키는 군사들과 성을 함락하고자 하는 군사들 사이의 격렬한 전투 장면이었다. 화살이 날아다니고 칼이 춤을 췄다. 사람들이 나뒹굴었다. ‘참 기술 좋네. 아주 그럴듯하게 잘 찍었네’ 생각하고 있을 때 막내가 나를 툭툭 쳤다.

“아빠, 이거 찍고 있는 사람도 죽는 거지?”

이게 무슨 소리지? 질문을 이해해보려고 머리를 굴려봤지만 실패했다. 아이는 답답해하면서 질문에 설명을 추가한다. 아이의 말은 그러니까 ‘지금’ 어딘가에서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있고 그 장면을 ‘지금’ 누군가가 카메라로 찍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으니 결국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도 ‘곧’ 죽게 될 거냐는 말이었다.

와..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막막했다. 영화나 영상에 대한 지식도 전혀 없어서 설명도 잘 못할 것이 뻔했다. ''E. H. 카'라는 역사학자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 없는 대화'라고 했단다'부터 시작해야하나? 택도 없는 소리. 왜 사람들은 옛날 건물을 배경으로 옛날 옷을 입고 있을까? 게다가 지금 이 TV는 일시 정지도, 오프닝 건너뛰기나 2배속으로 보기도 불가능하다는 걸 어떻게 설명하지? 나는 가까스로 사극의 한 장면을 따라하며 아이 앞에서 죽음을 연기했다. 감았던 눈을 잠깐 떠서 설명을 덧붙이고 다시 눈을 감았다.

“아, 그리고 이 장면에서 입에서 흘러 나오는 건 피가 아니고 케첩이야 케첩 (꼴까닥)”

아이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실제 사람들이 ‘지금’ 죽지는 않았다는 것과 이 장면을 촬영하고 있는 사람도 ‘곧’ 죽지 않을 것임을 알고 안도하는 듯했다. 뒤늦게 TV 상단 구석에 12세인지 15세인지 관람 불가 나이가 숫자로 표시되어있는 걸 보고 아차 싶어 급하게 채널을 돌렸다.

아이들의 냉동 삼겹살 첫 경험은 의외로 수월하게 진행됐다. 기울어진 불판을 타고 흘러내려 종이컵에 모이는 기름을 신기해하며 능숙하게 쌈을 싸 먹는다. 이모님 설명을 듣고 불판 아래 부분에 콩나물무침과 김치를 올린다. 그 와중에 나는 ‘돼지고기는 상추나 깻잎과도 잘 어울리지만 명이나물과도 잘 어울리(고 명이나물은 비싼 거)니까 많이 먹으라’고 조언한다. 냉동 삼겹살 2인분을 추가로 주문한다.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안심이 되어버리고만 나는 그만 맥주를 한 병 주문하고 만다. 운전 걱정 없이 숙소 근처 고기집에서 맥주까지 마시는 날이 오다니. 너희에게도 나에게도 아직 새로 경험하고 알아가야 할 게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산을 마치고 나올 때 아이들이 식당 명함을 챙기는 걸 보니 아이들도 퍽 마음에 들었나 보다

“이 게임 어떻게 하는거야? 이 포켓몬들을 잡는거야? 어떻게 잡는거야? 잡으면 이기는거야? 이기면 디스크가 나오는거야? 디스크는 어떤 게 좋은거야?”

사극을 보다가 질문을 던진 막내처럼 나도 아이들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아이들은 열심히 설명했지만 나는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좌절하지는 않았다. 너희도 나에게 배울 것이 있지만 나도 너희에게 배울 것이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지금 나의 역할은 동전교환기에서 나오는 500원짜리 동전들을 받아 기분 좋게 아이들 앞에 놓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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