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새벽에 깼다. 잠결에 송이 바지에 손을 대 본다. 축축하다. 한두 달 전부터 송이는 밤기저귀를 떼는 연습 중인데 아직까진 절반만 성공하고 있다. 운이 좋으면 밤 사이에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이날은 침대에서 소변을 봤다. 비몽사몽인 송이를 들어 화장실로 옮긴다. 미지근한 물로 엉덩이를 씻기고, 옷가지와 젖은 이불을 세탁물 바구니에 넣는다.

송이는 다시 잠들었는데, 정작 내 잠이 달아났다. 누운 채로 스마트폰을 잠깐 본 게 실수였을까? 20~30분 동안 뒤척이다가 부엌으로 나와 불을 켰다. 오랜만에 다시 일기를 써볼까. 아내에게 선물 받은 <10년 일기장>을 펼쳤다. 이 일기장은 하루마다 두 페이지씩 할당되어 있는데 그 하루가 10개의 칸으로 나뉘어 있어 특정 일의 10년 치 일기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물론 꼬박꼬박 썼을 때의 이야기다.

10월 부분을 펼쳤다. 지난해 일기는 비어 있고, 2년 전 일기가 적혀 있었다. 송이와 부산에서 한 달 살이를 막 시작하던 때였다. 당시 18개월 차에 접어든 송이는 말을 하지 못했다. 온전한 문장 대신 몇 개의 단어만 드문드문 내뱉는 식이었다. 42개월에 접어든 송이는 아침에 눈 뜬 순간부터 잠들 때까지 말을 한다. 때로는 맥락 없이 아무 말이나 마구 하지만, 조금씩 자신이 궁금해하는 걸 진지하게 묻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송이가 물었다.

“아빠, 공룡은 왜 사라졌어요?”

“그러게, 공룡은 왜 사라졌을까? 운석이 충돌했던 것 같기도 하고, 외계인이 잡아갔나.”

다들 공룡에 빠진다는 그 시기가 온 건가. 돌이켜보면 나도 어린 시절에 공룡을 꽤 좋아했다. 초등학생 때 공룡 발자국을 보러 경남 고성까지 가족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성인이 된 지금까지 공룡을 완전히 잊고 지냈다. 흠, 근데 공룡이 왜 사라졌더라?

평소 아이에게 유튜브를 안 보여주지만, 이날은 나도 공룡이 사라진 이유가 궁금해졌다. 우리는 이례적으로 영상 하나를 세 번 연속 봤다. <한눈에 보는 세상 Kurzgesagt> 채널에서 한글로 더빙한 ‘공룡 멸종의 날’ 에피소드다. 덕분에 잊고 있던 공룡에 대한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고, 송이의 관심은 증폭됐다. (그 후 며칠 동안 송이가 계속 영상을 보여달라고 말해서 요즘은 다시 원칙대로 스마트폰을 보여주지 않는 방향으로 바꿨다.)

우리는 시간이 날 때면, 공룡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공간을 찾았다. 국립과천과학관의 자연사관, 서울의 서대문자연사박물관 등에 다녀왔고 ‘왓어원더’에서 선보인 공룡을 모티브로 한 장난감을 조립하기도 했다. 아내는 도쿄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티라노 사우르스 모형을 사 왔다. 추석 연휴를 맞이해 친구네 가족과 다녀온 여행 중 들른 속초의 문우당서림에서도 공룡 그림책을 샀다.

송이가 공룡에 관심을 갖는 건 사실이지만,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 대상은 주로 티라노사우르스(T. rex)에 쏠려 있다. 심지어 본인은 초식공룡보다 육식공룡이 좋다며, 티라노사우르스 흉내를 내곤 한다. 왜 하필 티라노일까. 가장 세 보여서? 공룡 중에서도 소위 브랜딩이 잘 되어 있는 걸까?

미국소아과학회 아서 라빈 교수에 따르면, 아기는 생후 첫 3개월 동안 본인의 존재를 모른다. 아기의 자아는 돌이 지난 뒤, 3년 사이에 형성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여전히 주위 세상에 대한 혼돈은 있다. 그리고 3살부터 상상과 감정이 생겨나며 자아가 완성되는데, 그즈음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놀이에 집착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송이가 어쩌다 공룡에 빠졌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몇 가지 이유를 추측해 본다. 공룡의 흔적이 여전히 지구 곳곳에 있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진 존재라는 신비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물관에서 엄청나게 큰 스케일을 경험했으니 우선 ‘센 존재’였을 거란 생각이 송이의 상상력을 자극했을 것 같다. 송이는 스스로 아직 작은 존재라는 걸 알고 있다. 이따금 “아빠, 나 그새 이만큼 컸지?”라고 동의를 구하곤 한다. 그런 송이에게 티라노사우르스는 닮고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크고 강력한 존재일 수 있겠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송이가 공룡에 관심을 갖게 된 최초의 계기는 어린이집에서 교육용으로 보여준 <주니토니* 공룡동요>인 것 같다. 한 번은 송이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 키즈캐슬이 만든 애니메이션 시리즈.

“공룡이 죽은 건 왜 궁금했어?”

“토니가 알려줬지.”

“토니?”

“주니토니 몰라? 어린이집에서 <주니토니> 보여주거든. <주니토니>는 내용이 되게 많고, 여러 개가 있어. 그중에 공룡이 멸종하는 게 나오거든.”

개인적으로는 <한눈에 보는 세상 Kurzgesagt> ‘공룡 멸종의 날’ 에피소드의 마지막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내레이터는 공룡과 인류가 각각 살아온 기간을 비교*했는데, 지금까지 우리는 공룡이 존재했던 시간의 0.18% 동안만 존재해왔다고 한다.

* 공룡 1억 650만 년, 현대 인류 20만 년. 

인류는 상대적으로 매우 짧은 기간 동안 이렇게 문명을 번성시켰고, 이제는 인간 수준을 초월하는 지능의 출현을 앞두고 있다. 만약 인간보다 두뇌의 용량이 더 큰 새로운 종이 등장한다면, 그래서 또 한 번의 시대 격변이 일어난다면, 언젠가 그들도 ‘인간이 사라진 이유’를 궁금해할까. 미래를 감히 예측할 순 없겠다만 공룡 덕분에 삶의 유한함을 다시금 깨닫는다. 이번에는 내가 송이에게 물었다.

“멸종이 뭐야?”

“사라지는 거지.”

“우리도 그러면 사라지는 걸까?”

“그럼! 우리도 사라지지. 그런데 언제 사라질지는 아무도 모르지.”

사라질 때, 사라지더라도 여전히 궁금하다. 2년 뒤 송이는 무엇에 관심을 가지려나. 그때에도 시큰둥하거나 무관심한 대신, 동심으로 돌아가 나도 적극적으로 송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살펴볼 수 있으면 좋겠다.

Fathers’ Note

💬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하던 시절을 지나 일하는 엄마로 산지 9년차네요. 생각해보니 저도 규성님처럼 매일 오가는 답답한 지하철 속에서 가끔 들려오는 아이들 소리에 귀가 번쩍 뜨이고, 출근 길 아침부터 부모 손에 이끌려 어딘가로 향하는 고단한 아이들의 얼굴이 짠하고 귀여워 눈길 한번 더 보내는 날들이 많네요. 내 아이만이 아닌 다른 아이들까지 소중하고 귀여운 기적이라니… 제 딴에도 사회생활 한다고 월요일마다 힘겹게 일어나 집을 나서는 아이의 마음을 한번 더 보듬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냥꾼)

💬 캐나다에서 워홀로 지낸 지 4개월째인데요. 오늘 레터에서 쓰신 ‘어른의 배려’를 몸소 깨닫고 있어요. 일례로, 오렌지 셔츠 데이라고 해서 박해받았던 원주민 아이들을 위해 기념하는 날인데요. 광장에서 인디언 촌장님께서 인디언 노래를 어린이들에게 헌정한다고, 어린이들에게 일어서 달라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날 정말 충격받았는데요. 한국에 평생 살았던 저에겐 어린이란, 특히 공공장소에서 남에게 폐 끼치지 말아야 하는 존재, 그리고 땀 뻘뻘 흘리며 어린이를 자제하는 부모님 인상이 강하게 남아있었습니다. 설령 한국의 어린이날이 있다고 한들, 그저 수많은 공휴일 중 하루일 뿐이었습니다. 어린이를 이런 방식으로 존중하는 건 처음봐서 정말 놀랐어요. 또한 임신한 여성 혹은 어린이에게 양보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어요. 카페나, 길거리나, 버스 등 일상에서 정말 자연스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를 어린이 자체로 인정하는 분위기입니다. 설령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한다고 한들, 그거 가지고 기분나빠하는 분위기가 아닙니다. 조금 시끄럽지만 ‘어린이니까’ 이런 분위기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어린이를 점잖게 키워야 하는, 폐 끼치지 말아야 하는 존재로 통제하고 있지 않나 그 생각이 듭니다. 어린이는 어린이 자체로 인정하는 것이 어른의 배려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너무 경제활동을 하는 어른 위주의 사회이지 않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막상 사회를 돌아보면 어린이, 노인, 장애인, 외국인 등등 정말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저희는 그 사실을 간과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주해영)

💬 너무 좋았어요. 요즘 아기를 키워보니 보이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포인트들이 많은데 (노키즈존, 비행기에서 스티커 붙이기 이슈 등) 뭔가 경쟁하듯 좀 뾰족한 느낌이었는데 이건 둥글둥글~? ㅎㅎ 백팩을 메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어른도 그분만의 사정이 있겠지만 그래도 덩치만 크고 마음은 작은 어른이 아니게끔, 너무 핸드폰만 보며 자라는 어른이 되지 않게끔 저희 아이도 그렇게 키워야겠다는 가르침을 얻습니다. (유키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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