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벌써 9월, 정확히는 10월을 목전에 둔 9월 말이다. 아침 8시에 현관문을 나서고, 만원 버스와 지옥철을 타고,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고, 집에 와 아이 양치를 시킨 후, 아이랑 같이 잠든 게 전부인데. 벌써 365일 중 272일이 지난 것이다. 크리스마스도 제야의 종도 100일이 채 안 남았다.

회사는 열심히 다녔다. 빨래와 건조기도 (여름엔 스타일러 건조 기능까지) 열심히 돌렸다. 음식물 쓰레기와 분리수거도 꾸준히 했으며, 식물에 물도 꾸준히 주었다. 부부싸움도 꾸준히 했고, 아이와의 티격태격도 잊을만하면 있었으며, 100km 이상 이동한 가족여행도 적지 않게 갔다. 소아청소년과에서 진료 후에 주시는 텐텐 캔디와 단골 햄버거 가게에서 두 개씩 챙겨주시는 뽀로로 비타민(이라 쓰고 사탕)도 이미 50개 이상 받은 느낌이다. 

분명 무언가 열심히, 바쁘게 살았는데 왜 보람과 성취감 대신 허무감과 당혹감이 앞서는 건지 모르겠다. 분명 매일 많은 일을 성실히 한 것 같은데 왜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은 걸까. 왜 벌써 아이는 다섯 살이 되었고 왜 벌써 유치원 입학 준비를 해야 하며 왜 우리 가족은 전세 만기를 앞두고 새집을 구해야 하는 걸까. 무엇보다 많이 남았다고 생각했던 시즌2 내 차례의 마감일은 왜 벌써 이번 주고 왜 나는 미리 써둔 일기 하나가 없는 걸까. 

작년 말 이직을 한 후 우리 집 육아체계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출퇴근 시간이 앞뒤로 늘어나면서 등 하원을 아내가 전담하게 되었고, 평일에 아빠로서 아이랑 보내는 시간도 줄어들어 하루 동안 ‘양치하자~' 와 ‘이제 잘 시간이야~' 만 말하는 아빠가 돼 버렸다. 내가 육아휴직을 했던 전 직장의 동료들은 여전히 내가 육아를 많이 하는 줄 알고 있지만, 현 직장의 동료들은 ‘육아도 별로 안 하는 것 같은데 육아일기를 쓴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런 현실 속에서 다섯 아빠가 줌으로 모여 시즌2를 다시 시작하기로 결단했을 때 사실 기쁨보다는 막막함이 앞섰다. 시즌1 당시에는 육아휴직 6개월이라는 강력한 화수분 덕에 일상의 에피소드만 풀어내도 논픽션 육아 다큐멘터리 한 편이 완성되었지만, 시즌2는 아이랑 마주했던 순간의 비일상적 공기 질량과 온습도까지 기억해 묘사하는 소설가가 돼야 할 것 같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막막한 심경을 마음 끄트머리에 숨겨둔 채 출근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운 좋게 초반부터 지하철에 빈 좌석이 생겨 앉아 갈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자리 앞으로 사람들이 가득 들어섰고 어느 순간 내 눈앞에는 핑크색 배지를 가방에 두른 여성 한 분이 서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임산부 먼저' 배지였다. 왜 ‘현생에 찌든 직장인이자 5년 차 아빠' 배지는 없을까란 망상을 잠시 했지만, 의미도 재미도 없었기에 정신을 차리고 자리를 양보했다. 

몇 정거장 더 지나 문 앞까지 사람이 꽉 들어찼을 무렵, 사당역에서 한 사람이 백팩을 맨채 지하철로 무작정 들어왔다. 문 앞에는 한 엄마와 엄마 키의 반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서 있었으나 이어폰을 낀 채 핸드폰 게임에 몰두하고 있던 그 사람은 아이가 있는지도 모른 채 거친 백팩을 맨 등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 아이로선 이미 키 큰 어른들 사이에 갇혀 있던 상황이었는데 또 다른 어른에 의해 더 갇히는 상황이 되어버렸고 아이 엄마는 빈틈없는 지옥철 안에서 아이에게 숨 쉴 공간 하나 마련해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남들의 불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본인만의 세계에 빠져있던 그 어른과 불편함을 참고 버티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누가 진짜 어른이고 누가 아이인지 분간이 안 가는 상황이었다. 

뾰족한 수 없이 다음 역을 향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아이 근처 좌석에 앉아 계시던 한 할머니가 엄마와 아이를 부르더니 아이를 꼭 안고 본인의 무릎에 앉히셨다. 만약 지하철 공간이 여유로운 상황이었다면 아이 부모가 불편하게 느낄 수도 있는 옛 어른의 오지랖이 넓은 것이었겠지만 그 상황에선 아이의 엄마도, 지켜보고 있던 나도 감사함이 먼저 앞서는 진짜 어른의 배려로 느껴졌다. 

다양한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의 불편을 돌보기 위해 본인의 불편을 감수하는 참 어른의 모습. 그리고 수많은 아이를 겪어봤을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한편으로 키만 크고 마음은 좁은 어른들.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 약자는 물론 타인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 모두가 각자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사회. 그래서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말 걸지도 않는 게 당연시되는 사회. 아이를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 옛 어른들이 다 사라지고 핸드폰만 바라보는 어른들만 남은 사회. 온통 아이와 어른, 그리고 이 사회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아이가 생긴 뒤로 새로운 감각들을 종종 느낀다. 내 아이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는 감각. 사회 문제를 단순히 남의 일이 아닌 내 아이가 겪을 수도 있을 중요한 일로 느끼는 감각. 아이를 향한 누군가의 다정함과 배려, 또는 무심함과 무책임을 더 특별하게, 더 예민하게 느끼는 감각. 아마 양육자라면 모두가 느낄 수 있을 그런 감각.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가지지 않은 10년 전의 나는 절대로 못 느꼈을 그런 감각. 

이런 감각들을 떠올리니 시즌2의 막막함이 살짝 줄어든다. 매일 아이랑 붙어있지는 않지만 5년 차 양육자의 감각으로 일상을 누리다 보면 분명 내 촉수에 걸리는 각양각색의 희로애락들이 있지 않을까 싶다. 설령 공기의 질량까지는 모르더라도 양육자로서 느끼는 마음 온도에 대해선 누구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을 테니까.  

시즌2에서는 시즌1보다는 덜 불행한 소재로 더 많은 감사함을 표현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비록 올라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출산율과 출생률, 여전히 아이는 배제된 어른 중심의 사회적 인프라, 이민 욕구를 자극하는 폭염과 미세먼지 등 비교‧비난‧비관하고 싶은 소재들이 많지만, 소모적인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줄여 부족한 내 시간과 내 가족과의 시간에 남은 에너지를 쓰고 싶다.

말한 김에 내가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동안 나에게 호의와 배려 따듯함의 덕을 베풀어 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른들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싶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호의와 배려 속에 자랐다.)

그리고 빠르게 흘러간 올 한해의 시간에도 감사함을 느낀다. 

지나간 시간을 '빨랐다'고 느낄 수 있는 건, 

큰 나쁜 일 없이 그 시간을 잘 버텼다는 반증일수도 있기 때문에.

Fathers’ Update

💬 저도 어릴 때 너무 잘 넘어져서 무릎이 성할 날이 없었는데요, 내 무릎이 까졌을 때 아빠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저에게 잔소리를 마구 퍼부을 때마다...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1년 전 아이가 막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반바지를 입혀 산책을 나갔다가 시장에서 넘어져 얇은 기스가 나는걸 보고 심장이 정말 쿵 떨어졌습니다. 그대로 바로 아동복집으로 가서 긴 바지를 입히며 '이 작은, 새로운, 연약한 아이에게 기스를 내다니ㅠ ㅠ' 하고 눈물이 핑 돌았어요. 내 것이 아니나 내 것이 상한 것보다 더 아프고 쓰린 것이 자식의 상처라는 것을. 오늘 레터를 보며 다시금 생각했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밤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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