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안녕하세요, 님. 이번 편지는 캐나다에서 돌아온 정우님이 보냅니다. 귀국 후 다시 이사할 집을 구하고 그 집을 채울 가구와 가전제품을 보러 다니면서 정우님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아이들은 적응을 잘하고 있을까요? 지금 바로 확인해 보세요.

지하철에서 내려 성큼성큼 계단을 오른다. 부동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중개인은 분주하게 서류를 보고 있고 한쪽 편에는 임대인 부부가 앉아있다.

“날씨가 참 덥네요.” 

오래된 벽걸이 에어컨에서 물방울이 배수 파이프를 타고 똑똑 떨어진다. 때가 되자 임대인, 임차인, 중개인 3자가 펼쳐진 서류들 앞에 둘러앉는다. 아마도 벌써 몇 번은 봤을, 그럼에도 볼 때마다 새로운 임대계약서. 중개인이 계약서에 있는 문장을 한 줄 한 줄 펜 뒤 끝으로 따라가며 소리 내 읽는다. 한 문장이 끝나면 중개인은 계약 당사자들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 잠시 뜸을 들인다. 나는 그때마다 이해했다는 표시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 못 함). 정해진 위치에 날인을 하고 종이 석 장을 겹쳐 간인을 한다. 계약금을 이체하고 영수증을 받는다. 

“예쁘게 잘 쓰겠습니다.”

임대인 부부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다시 지하철역으로 내려간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잠깐 올라갔다 내려온 사이에 앞으로의 2년이 결정되었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진행상황을 보고 공유한다. 이 큰돈으로 무슨 짓을 한 거지. 혹시 빠트리거나 놓친 부분은 없을까. 잠깐 걱정을 하다가 지금 서류를 다시 본다 한들 이미 늦었다는 생각에 눈을 감는다. 이게 맞는 걸까. 맞다는 확신이 없으니 혹시나 틀리지는 않았을지 불안한 마음이 든다.

우리에게 좋은 집을 찾으면 됐었다. 우리 마음에 드는 집. 우리가 익숙한 동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지역을 찾았다. 그러다 더 마음에 드는 곳이 생기면 훌쩍 그곳으로 옮기면 그만이었다. 우리의 첫 집도 퇴근길 중간쯤 보이던 아파트였다. 빨간 광역버스를 타고 꾸벅꾸벅 졸다가 저기쯤이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던 아파트가 우리의 첫 집이 되었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되고 나니 옮기기가 쉽지 않다(고들 한다). 이제는 가족의 구성원의 수만큼 ‘우리’라는 단어의 외연도 확장되었다. 생소한 동네도 고려해야 하고 경제적인 부담도 감내해야 한다. 그리고 뿌리를 깊고 길게 내릴 준비를 해야 한다. 아이가 초등학생인 집이 이사를 한다고 하면 으레 어느 어느 동네를 추천한다. 

“거기 한 번 들어간 사람들은 너무 만족해서 평생을 거기서 산다더라.” 

“그런 데는 조부모까지 3대가 나란히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게 흔하단다.” 

아니,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아이 1도 좋고 아이 2도 좋고 아이 3도 좋은 그런 유토피아 같은 곳이 있단 말인가. 아이를 키우든 키우지 않든 누구나 그 정도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는 듯이 이야기를 한다. 어디는 이래서 좋고 어디는 저래서 좋고. 조금이라도 그 범주에서 벗어난 동네는 사람들의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나 역시 이사할 집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확신이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는 이래서 좋아. 아이들에게도 이래서 좋을 거야. 부족한 부분은 내가 이렇게 메울게. 나 아직 육아휴직이 좀 남았잖아. 살다 보면 더 좋아하게 될 거야.’ 말은 아내를 향했지만 실은 나한테 하는 소리였다. 나이 40에 아직도 내 ‘장래희망’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겠는데 희망찬 장래 따위를 말해야 하다니. 공자님, 마흔이면 혹하지 않는다는 말이 정녕 사실입니까. 이렇게 불안한데 말이죠.

이삿날이 맞지 않아 처가와 에어비앤비를 전전하고 있다. 아이 셋을 달고 다닌다는 것만 빼면 집이 없었던 신혼 초로 다시 돌아간 셈이다. 들어갈 집만 정해져 있고 몸도 마음도 붕 떠 있는 시간. 해지했던 인터넷이나 정수기 케어서비스도 신청해야 하고. 아, 케어서비스를 받을 정수기가 없구나. 여기저기 나눠주거나 팔아버린 가구와 가전제품을 다시 사야 한다. 드래곤볼은 다 모으면 소원이라도 하나 빌 수 있지. 천편일률적으로 은색이던 냉장고나 세탁기들은 이제 천편일률적으로 은색을 제외한 모든 색깔을 하고 가지런히 놓여있다. 번쩍번쩍 빛나던 은색 가전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세탁기와 건조기는 위아래로 붙어있던 시절을 지나 둘을 합친 일체형까지 나왔더라. 거꾸로 두 개면 충분한 것만 같았던 냉장고의 문짝 수는 이제는 네 개나 된다. 위아래 문짝의 색깔은 물론 다르다.

아이들은 다행히 새로운 학교에 생각보다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다. 정작 나는 이해하지 못했던 임대차계약서로 학교의 이해를 구해 이사 전임에도 아이들을 학교에 등록할 수 있었다. 아이 셋의 등교/등원 시간이 비슷해서 함께 초등학교 앞에서 인사를 나누고 조금 뒤 막내를 유치원 셔틀버스에 태워 보낸다. 하교/하원 시간은 모두 달라 오후가 되면 한두 시간 간격으로 몸이 바빠진다. 그래도 덕분에 아이들의 하루를 한두 시간씩 따로 들을 수 있다. 급식은 어땠는지, 숙제가 있는지, 어떤 친구를 사귀었는지. 길을 걸으면서 종알종알 각자의 하루를 보고 공유하던 아이들이 자연스레 나의 손을 잡는다. 그러면 그 작은 손에 나의 마음은 그만 안정되어버리고 만다. 그래. 틀리지는 않은 거야. 설령 정답은 아닐지라도 틀리지는 않았다는 확신이 들게 만드는 작은 손. 아직은 ‘어디’보다 ‘누구’가 더 값진 이 상황에 안도한다. 

이삿날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아직 거실 소파조차 결정하지 못한 상태이지만 세탁기와 건조기는 일체형으로 사볼까 하는 자그마한 용기가 생겼다. 색깔은 되도록 은색으로.

Fathers’ Update

지난 레터(101화 사랑이 흐르는 곳)를 읽고 구독자 분들이 보내주신 답장 일부를 소개할게요. 고맙습니다.

💬 지나간 계절만큼 우리 아이들이 훌쩍 커버린 지금, 다시 만나니 예전에 다니던 분식집을 다시 찾은 것 마냥 반갑고 위로가 되고 그러네요. 앞으로의 스토리도 기대할게요. 다시 와주서 감사해요! (아이둘워킹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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