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안녕하세요, 님. 추석 연휴를 맞아 이번에도 썬데이 파더스 클럽에서 특별한 손님을 초대했습니다. IBM, 제일기획, 퍼블리 등을 거쳐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잠시 휴식기를 갖고 10살 아이와 진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황우진 님이에요.

우진 님네 가족이 지난여름, 미국과 캐나다로 6주 동안 여행을 다녀왔다고 해요. 과연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요? 황우진 님의 레터로 명절 인사를 대신드려요. 긴 추석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8월 중순은 예상보다 꽤 추웠다. 새벽이 되면 6도까지 떨어졌다. 아들과 둘이 캠핑카의 침낭 속에 꼭 붙어 한기를 이겨내야 했다.

* 미국 최초의 국립공원이자 최대 국립공원. 와이오밍, 몬타나, 아이다호 주에 걸쳐 있으며, 미네랄이 풍부한 온천수가 석회암층을 흘러내리며 바위 표면을 노랗게 변색시켜 붙여진 이름이다.

“아빠가 준비를 덜 했네. 우리가 미국에 살았으면 이불을 더 챙겨 왔을 텐데….”

“이렇게 예상 못한 일이 일어나야 여행이지.”

아들이 은근히 툴툴거렸다. 여름옷만 잔뜩 챙겨 온 나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올해 초 퇴사를 했다. 다음 커리어를 준비하기 전에, 아이와 함께 평소보다 긴 여행을 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이제 10살이 된 아이는 학기 중이나 방학 상관없이 학교와 학원으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나와 아이, 우리 가족에게 지금이 아니면 함께 긴 여행을 할 기회가 많지 않아 보였다.

그래 지금이 기회야. 이번에 한 번 제대로 시간을 보내보자. 이왕 길게 가는 거, 영어 캠프에 참여해 보고 여행도 하면서 아이가 다른 나라의 삶을 느껴보게 하자! 이때부터 하루 3시간 이상씩 검색하면서 계획을 세웠다. 그 결과 대략 이런 일정을 짜게 됐다.

• 시차 적응 겸, 미국 문화의 심장부 뉴욕과 정치, 외교의 수도 워싱턴 D.C. 여행
• 3주 동안 캐나다 밴쿠버에서 영어 캠프 참석 (아이만)
• (아들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옐로스톤 국립공원을 (나의 오랜 로망인) 캠핑카로 여행

이렇게 하니 영어 캠프만 보냈다면 3주 정도 걸릴 여행이 총 6주로 늘어났다. 아이에게 더 많은 곳을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우리 아들 얼마나 좋을까!’ 내가 다 설렜다.

하지만 아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나의 바람처럼 좋아하지 않았다. 역시 그럴 리가 없지.

뉴욕의 마천루를 보면서 세계 경제, 문화 중심지의 위용을 봐주길 바랐지만, 아이는 첫날부터 배탈이 났다. 이 도시에서 풍겨오는 퀴퀴한 냄새와 빌딩 숲의 어마어마한 더위 때문이다. 때마침 기상 이변으로 더 뜨거워진 미국 동부의 더위는 아들이 야외에서 걷는 것 자체를 거부하게 만들었다. 자유의 여신상은 그냥 배에서만 보는 게 최고인 관광지가 됐고, 록펠러 센터에서 보려던 시내의 야경은 늦게까지 꺾이지 않는 여름 햇살 때문에 온전히 감상하기 어려웠다. 오죽하면 아이가 뉴욕에서 보낸 가장 좋았던 일정 중 하나로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낮잠 잔 시간’을 언급했을까. 모네, 샤갈, 앤디 워홀의 작품이 가득한 그곳에서 말이다. 아이와 다니는 걸 감안해 하루 한두 군데 정도만 다니기로 계획을 짠 과거의 내 선견지명에 감사했다. 

워싱턴 D.C.에서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실내 일정이 많았다. 백악관에서 링컨 기념관까지 걷는 동안 결국 아이에게 폭풍 잔소리를 했지만, 그래도 심한 짜증을 부리지 않고 따라와 주었다. 그렇다고 아빠가 기대했던 ‘스미스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에서 동물 이야기하며 즐거운 추억 만들기’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는 오히려 광물관에서 비싼 보석 보는 걸 가장 신나 했고 여기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다. 꼭 먹고 싶다던, 치즈가 잔뜩 들어간 파스타를 맛있게 먹으며 행복한 저녁 시간을 보낸 건 나름의 추억으로 기억하지 않으려나.

그래도 괜찮다. 뉴욕과 워싱턴 D.C.에서의 일정이 메인은 아니다. 3주의 영어 캠프가 끝나고 그토록 바라던 옐로스톤 캠핑카 여행이 시작됐다. 하지만 캠핑카 여행은 내 로망과 많이 달랐다. 승차감은 트럭 수준이라 멀미가 심했고, 예상보다 추운 날씨 때문에 아들은 남은 여정 내내 감기에 걸린 상태로 지냈다.

구석구석 멋진 자연경관을 보여주고 싶은 아빠의 마음과 달리, 아들은 차에서 내려 1시간 정도만 움직이면 열이 올라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덕분에 유명 관광지에 내려서 사진만 찍고 다시 버스로 이동하는 패키지 관광 같았다. 일주일 동안 아들과 제일 많이 본 경관이 캠핑카 내부에서 바라보는 옐로스톤의 울창한 숲이라니….

하루하루 캠핑카 렌트비를 아까워하며 타들어 가는 내 마음과 달리, 아들은 “캠핑카에서 보내는 시간은 너무 즐거워. 운전석 위 동굴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도 정말 좋아”라며 본인만의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이곳저곳 오래 보지 못한 게 아쉽긴 한 건지 ‘나중에 신혼여행으로 다시 오겠다’는 이야기로 마지막에 내게 큰 웃음을 준 건 덤. 아빠는 같이 안 올 거라고 미리 으름장(?)을 놓기도 했는데, 아들이 다시 말했다. 다 같이 여행하면 좋은 건데 왜 같이 못 오느냐고 말이다. 그래, 나중에 엄마, 아빠 그렇게 챙겨주렴.

10년 전 아이가 태어났을 때 다짐한 것이 하나 있다.

‘이 아이는 내가 원하는 걸 똑같이 원하지 않을 것이며, 내가 좋아하는 걸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바라는 걸 못해도 실망하지 말고, 아이가 잘하는 걸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부모가 되자’.

대단한 다짐은 아니지만, 꼭 지키고 싶은 다짐이었다. 아이와 10년을 함께 해보니 이 다짐을 지키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는 걸 깨닫고 있다. 양육자라면 영어 캠프에서 다른 나라 친구를 만나고 외국인 선생님과도 친해지며 다양한 사람과 어울리길 바랄 것이다. 내 아이는 친숙한 한국 친구들과 어울리며 게임 이야기를 했고, 수업 시간에는 조용히 질문에만 대답했다고 한다. 지금의 아쉽고 또 아쉬운 이 마음은 나의 바람과 이 녀석의 바람이 달라서겠지. 

아이는 늘 본인 기질과 취향을 바탕에 두며 성장해 왔다. 나를 위해서가 아닌, 본인의 삶을 잘 즐기며 자라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아쉬웠던 부분을 복기해 보면 내가 여행을 즐기는 방식과 아이가 즐기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나는 새로운 것에 빠르게 적응하며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다. 아이는 먼저 안정적인 환경을 만들고 천천히 적응한 다음, 새로움을 찾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아직 내 수양이 부족해서 이런 아들을 답답해하며 채근할까 걱정도 되지만 (이미 좀 그러고 있다), 아이의 바람을 그대로 인정하고 기다려주는 아빠가 되려고 노력 중이다. 그러니까… 당분간은 괜찮은 아빠로 지낼 수 있지 않을까?

Bonus Talk

“이번 미국 여행에서 남편은 아이의 최애인 펭귄을 만나게 해주고 싶어 했다. 남극이나 남미를 당장 갈 수 없으니 (언젠간 둘이 다녀오겠다고) 뜬금없이 샌디에이고를 가서 만나게 해 주겠다고. 뭘 그렇게까지? 솔직히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도 아주 조금…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다 둘이 펭귄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아이가 너무 행복해하는 모습도 좋았지만, 그것보다 남편이 더 행복해 보였다. 어쩌면 너무 좋아하는 아이를 보고 있는 것 자체가 남편에게 너무 행복한 일이라 꼭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단지 아이가 좋아할 것 같아서 간 게 아니라, 남편이 행복하고 싶어서 간 거라면 내게도 충분한 이유가 된다."

(2024년 9월 7일, 황우진 님의 배우자이자 10살 아이의 엄마 박소리 님의 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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