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1.

“하…..진짜 역대 급이었어." 

출근이 한창이던 어느 목요일, 이른 시간부터 온 아내의 카톡 첫 문장이 심상치 않다. 뒷글자만 보면 흡사 영화 감상평 같지만 ‘하…’로 시작하는 첫 마디는 긴급재난문자를 떠올리게 하였다. 

“단 거 끊자. 단 거 중독 같아. 택시에서부터 단 거 먹고 싶다고 난리였어. 이제 사탕, 초콜릿, 과자 금지, 시리얼 금지야. 밀크셰이크도 금지!!!”

아내는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택시를 늦게 잡거나 아이가 집에서 늑장을 부려 아내가 제시간에 출근을 못하기 일쑤지만 이번엔 다른 차원의 전쟁이었다.

어린이집까지 택시로 잘 도착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어린이집 문까지만 가면 되는데 그 사이 간식을 사달라는 고집을 부려서 건물 맨바닥에 드러누워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는 것이었다. 결론은 지지 않은 아내의 힘겨운 승리였으나 아내의 근태기록과 감정에는 흠집이 선명하게 난 것 같았다. 

불똥은 다른 곳으로도 튀었다. 매일 아침 바쁘다는 핑계로 거의 밥처럼 먹는 시리얼과 내가 하원을 시킬 때마다 들리는 햄버거집의 밀크셰이크가 떼쓰기의 출발점으로 지목된 것이다. 시리얼이 무슨 죄냐고 할 수도 있지만, 아내가 말하는 시리얼은 대부분 내가 사온 초코볼과 설탕이 풍부한 어른용 시리얼을 뜻했다. 사실상 본 사건의 악의 축은 매일 먼저 출근해 등원 전쟁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육아휴직 때부터 아이에게 초코볼 시리얼을 먹여온 한 명으로 좁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의 나라면 내 머릿속에 생생히 저장된 초콜릿과 아이스크림을 주는 아내의 모습들, 한 그릇을 기준으로 했을 때 줄어드는 당의 그람 수 등을 근거삼아 용의선상에 오른 음식들과 그 공급처의 결백함을 주장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끊임없는 학습을 통해 생존력을 키워온 동물 아닌가. 최근에 아내가 알려준 결혼생활 롱런하는 방법이 머릿속을 스치면서 지혜롭게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응 그러자. 나도 같은 생각이야!”

2.

아이가 벌써 인생 5년 차에 접어들고 신체적, 언어적 능력이 빠르게 발달하면서 나와 아내의 말을 안 듣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좀 더 정확히는 어떤 말인지는 다 듣고 이해하지만,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난공불락의 자아가 생긴 것이다. 

두꺼운 스웨터 안 입기, 검은색 신발 안 신기처럼 단순한 취향과 호불호의 차이로 생기는 갈등은 그나마 귀엽다. 가장 도전적인 난제는 침대에서 나오기, 등원 전 씻기, 외출 전 외투 입고 나가기처럼 상식적으로 해야만 하는 것들 앞에서 자기 고집을 피울 때 생긴다. 

특히 출근 시간이 정해져 있는 평일에 이런 당연한 영역에서 떼를 쓰기 시작하면 정말이지 답이 없다.* 훈육을 하는 것도, 원칙을 정하고 지켜나가는 것도 양육자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 가능한 일. 일상이 급한 아빠, 엄마는 결국 몇 번 다그치다가 말을 안 들으면 젤리와 과자 등으로 아이를 회유해 사회와의 약속을 지킨다. 

*이건 많이 순화를 한 표현이다. 실제로는 '답이 없다'보다는 '노답','빡친O', '킹받는다' 정도가 적확하다. 

아이는 탁월한 장사꾼이다. 아빠, 엄마와의 거래에서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는다. 여기에 그 누구보다 뛰어난 학습능력까지 갖췄다. 하기 싫은 걸 미루고 미루다 보면 더 좋은 제안이 들어온다는 걸 학습한 아이는 나 또는 아내의 요구에 일단 거절부터 하고 본다. 

성인이 지시한 후 15초 이내에 요구한 행동을 이행하지 않으면 아이가 말을 안 듣는다고 본다는 데, 바쁜 평일이나 약속있는 주말에는 아이의 행동을 기다릴 15초의 여유가 없어서 부모 스스로 새로운 행동에 나서고 새로운 제안을 하는 게 현실이다. 

나름의 가정 교육을 하기 위해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게 있다'는 사실을 틈틈이 강조하지만 이런 방식의 훈계는 정말 귓등으로도 안 들리는지 아이로부터 제대로 된 답변을 들은 기억이 없다.(이번 생의 훈육은 망한 걸까..)

3.

몇 차례 전쟁을 치르고 맞이한 토요일 아침, 나와 아내에게 소소한 복수의 기회가 찾아왔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없는 날이라 아이를 먼저 깨울 일도, 옷을 강제로 서둘러 입힐 일도 없는 것이다. 되려 아이가 먼저 일어나 본인의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안방 침대로 찾아와 누워있는 엄마, 아빠를 깨워서 부탁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말이 부탁이지 사실상 명령에 가까웠다.)

“아빠~~!! 일어나아~~!!”

“엄마~~!!! 내 말 들었어??”

모처럼 세 가족이 시리얼이 아닌 빵과 요거트로 여유 있는 브런치를 먹고 낮잠을 잔 뒤, 일찍 깬 나와 아이는 오랜만에 놀이터로 나섰다. 다들 멀리 외출했는지 단지 내 놀이터는 텅 비어 있었고 아이는 그 덕에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본인이 타고 싶은 모든 기구를 자유롭게 즐겼다. 

한시간 정도가 지나고 슬슬 목이 마를 때쯤 나는 아이를 차에 태우고 평소 자주 가는 카페로 향했다. 같이 카페에 들어간 우리는 얌전히 음료를 다 마시고, 곧바로 저녁 식사를 위해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아이가 좋아하는 곰탕집으로 향했다. 식당에서도 순둥이처럼 식사하는 아이가 기특해 오늘 웬일로 말을 잘 듣느냐는 칭찬 섞인 질문을 하자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나온다. 

“아빠가 오늘 내 말을 잘 들어주니까 그러는 거지!"

4.

나 같은 네 살 아이의 부모도, 학교 앞 편의점 근처에서 아이들 이야기를 하는 학부모도, 그리고 빵집에서 만난 대학생의 어머니도 공통으로 하는 말이 있다. 바로 '내 아이는 말을 정말 안 듣는다'는 것이다.

연령대를 불문하고 아이란 존재가 가진 공통점이 말을 안 듣는 거라면 아이란 존재, 자녀란 존재는 항상 말을 안 듣는데 부모의 관점에 따라 가끔 말을 잘 듣는 것처럼 보이는 거 아닐까. 말 안 듣는 아이에 대해 검색했을 때 뜨는 수많은 전문가들의 글과 영상에서 내 숨통을 트이게 해준 말도 우리 아이를 바꿀수 있다는 희망찬 말이 아닌 ‘우선, 아이들은 원래 말을 잘 안 듣기 마련이다.’라는 현실 인정의 말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돌이켜보면 모유와 분유만으로 배를 채우면 됐던 신생아 시절에도, 엄마 뱃속에서 탯줄 하나에 의지해 자랐던 태아 시절에도 내 아이는 부모 말을 듣지 않는 존재였다. 태아 시절엔 출산예정일 며칠 전까지 머리가 거꾸로 있어 제왕절개를 고민했었고, 신생아 시절엔 그 쉬운 먹고 놀고 자기를 못해 아내와 함께 육아서를 읽으며 공부를 해야했다. 애초에 내 인생도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은데 내가 아닌 누군가를 내 말대로, 내 뜻대로 움직인다니. 그 누군가가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한편으로 말 안 듣는다는 소리를 덜 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아이가 컸거나 내 자신이 아이란 존재로부터 자유로워 졌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내가 주도할 게 하나 없는 다 큰 성인 자녀에게 부모가 말을 안 듣는다는 표현을 거의 쓰지 않듯이, 내가 지금 아이가 말을 안 듣는 게 스트레스라면 내 아이가 실제로 아직 어리거나(어른보다 귀엽거나), 아니면 내 마음속 아이가 실제보다 더 어린아이로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육아의 종착지가 자녀의 독립이라면 부모됨의 종착지는 내 말 잘 듣는 자녀로부터의 독립 아닐까 싶다. 내 주도권이 99에서 1이 될 때까지 하나씩 포기하다보면 어느새 내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99가 되어 있을거고 나의 책임감과 강박감도 1정도로 줄어 있을지 모른다. 

소설같은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앞으로 아이를 대할 때 그저 어린 아이 취급하는게 아닌 같은 집에 사는 한 명의 타인으로 바라보고 그 타인의 말과 욕구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맞벌이 부모의 일정에 휘둘리며 어린이집으로 출퇴근하는 평일보다, 본인이 하고 싶은 걸 더 많이 하는 주말에 부모 말을 더 잘 듣는 아이를 보면 인간은 결국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야 하고 그 욕구는 어른이나 아이나 매한가지 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이의 자아정체성이 정말로 세지는 날에는 영화처럼 <예스 데이!>를 가져야 할 수도 있다…)

가끔 아름다운 네 살도, 악명높은 일곱 살도 아직 안 지났지만 이런 관점으로 아이를 바라보면 앞으로 닥칠 고난과 역경에 대해 내 탓을 덜하게 되지 않을까. 타인과의 동거는 원래 쉽지 않고, 요즘처럼 모든게 빨리 변하는 시대에 부모 말을 잘 듣지 않아야 더 크게 성공할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이 글을 읽을 또 한 명의 가까운 타인이 아이 말 이전에 배우자 말부터 잘 들으라고 하면 어떻게 답해야할까. 하…누군가의 말을 잘 듣는다는 건, 어른에게도 참 어려운 일이다. 

Yes Honey, Ok Dear. You’re Right!!

Fathers’ Update

💬 감동적이네요. 저는 이번 달에 아들을 처음만난 아빠라서 이제 출발점에 서있는데 오늘 레터 쓰신 분이 저에게는 반환점을 돌아서 오고 있는 분 같습니다. 그래서 위로가 되네요. 지금 이 순간도 애가 깰 까봐 조마조마하며 쓰고 있어요 ㅎㅎ 그래도 이 레터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주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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