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옆 동네 이웃 정은이 단톡방에서 링크 하나를 공유했다. 페이지를 여니 이런 문장이 우릴 맞이했다.

“아름다운 여름날, 자두나무와 밤하늘의 별이 가득한 자두마을 캠프에 초대합니다.”

아이가 생기니, 우리 가족의 여름방학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송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의 자율 등원 기간은 8월 첫째 주. 아내와 나도 그 기간에 맞춰 연차를 냈다. 지난 7월부터 몇몇 자연휴양림의 예약을 시도해 봤지만, 역시 모두 추첨에서 떨어졌다. 여름휴가 극성수기에 어디서 무얼 해야 할지 자포자기하던 즈음, 정은이 구세주처럼 등장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정은의 시아버님(이하 아버님)께서 우리를 구해주셨다. 충북 제천시 수산면에서.

7월의 마지막 일요일, ‘자두마을’로 불리는 작은 마을에 총 네 가족이 모였다. 정은네 부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이를 동반했다. 아이들 연령대는 세 살에서 다섯 살 남짓. 정은네도 얼추 나이가 비슷한 강아지 ‘자두’와 함께 했다. 우리의 첫 방문을 환영하며 아버님께서 손수 바비큐 요리와 더불어 근사한 한식을 차려주셨다. 그는 이런 인사말도 덧붙였다.

“제가 이 마을을 구상하면서 생각했던 게 ‘삼도사촌(三都四村)’이에요. 사흘은 도시에서, 나흘은 여기서 지내는 거죠. 한창 바쁜 젊은 사람일수록 자연과 가까이 지내는 게 중요하거든요. 어린이 손님들도 자주 와 주면 좋겠어요. 모두 환영해요.”

이번 캠프에 함께 한 일행들 모두 도시로 돌아가는 일정은 제각각이었지만, 우리 가족은 나흘을 그곳에서 지냈다. 머무는 동안, 월악산 주변 계곡에서 시원한 물에 몸을 담그며 두 번의 물놀이를 했고 충주호를 끼고 꼬불꼬불 굽은 길을 달려 단양군까지 가서 형형색색의 손톱달처럼 보이는 패러글라이딩도 구경했다. 한낮의 태양은 뜨거웠지만, 아이들은 틈틈이 차 안에서 낮잠을 자며 체력을 충전했다. 자두마을 꼭대기에 있는 온실에서는 모래놀이와 작은 풀장에서 물놀이를 병행했다.

하루는 아버님께서 뜻이 맞는 분들과 함께 매입했다는 근처의 폐교를 다 같이 방문했다.* 대략 6-7개 교실로 이뤄진 시골의 작은 학교였다. 건물의 외관은 아직 멀쩡해 보이나,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재단장이 필요해 보였다. 우리는 오랜만에 교실에 옹기종기 모여, 정은이 준비한 프로그램에 따라 게임을 했고, 복도에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했다. 종이비행기를 접어 누가 더 멀리 날리는지도 겨뤘다. 다른 일행과는 탁 트인 운동장에서 배드민턴을 했다.

* 청년학교는 아버님과 뜻이 맞는 교육자, 생태운동가 총 세 분이 함께 매입했다고 한다. 교육자는 대안학교인 제천간디학교를 설립한 양희창 선생, 생태운동가는 <야생초편지> 책으로 유명한 황대권 선생이다.

학령인구*가 점점 감소함에 따라 전국적으로 문을 닫는 학교가 늘고 있다. 2023년 3월 기준으로, 국내의 폐교 학교 숫자는 3,922곳. 그중 전남이 839곳으로 가장 많고, 충북도 260곳이나 된다. 아버님은 어떤 생각으로 폐교를 사셨을까? 정은이 덧붙였다. “아버님께서 나중에 별관에 양조장을 만들고, 본관은 젊은 사람들이 자주 방문할 수 있도록 숙박 시설이나 캠핑 시설 같은 것도 넣고 싶대요.” 테니스를 좋아하는 내가 사심을 섞어 답했다. “이 운동장에 테니스 코트 2면 정도 만들면 어때요? 샤워 시설도 하나 있으면 동호인들이 여행 삼아 종종 올 것 같아요.” 아버님의 꿈은 현실이 된 모습을 잠시 상상해 봤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그리 불가능해 보이는 꿈도 아니었다. 다만, 그 꿈이 가업승계처럼 대물림이 필요하다면 정은네 부부의 어깨가 무거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만 6세 이상부터 만 21세 인구.

아이들을 동반한 여정이다 보니, 실제로 정은이 계획한 일정의 절반 정도만 겨우 소화할 수 있었다. 뜨거운 날씨 속에 아이들은 번갈아 가며 낮잠 투정을 부렸고, 어른들도 땀을 많이 흘려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실내에서 틈틈이 쉬어야 했다. 이것은 여름휴가인가 혹서기 훈련인가 헷갈릴 정도였지만 그래도 낭만과 평화는 있었다. 해가 산 너머로 기울고 아이들이 모두 잠든 밤이면, 집집마다 한 명씩 교대로 나왔다. 숙소 앞 공터에 둘러앉아 불멍을 하며 시원한 맥주를 마셨다.

“여름방학 그것은 너무나 좋은시간

여름방학 그것은 태양이 주는선물

여름방학 그것은 너무나 좋은시간

여름방학 그것은 태양이 주는선물”

— 해바라기의 노래 ‘여름방학’ 가사 중

자두캠프에서 정신없는 3박 4일을 마치고(아내가 해바라기의 노래로 릴스를 만들었다), 서울로 돌아온 뒤 다시 3박 4일을 버틴 후에야 송이의 첫 여름방학이 끝났다. 꽤 많은 사진과 영상이 남았다. 데이터를 어찌 정리할지 엄두가 나지 않지만 가끔씩 사진과 영상을 볼 때마다 어른보다 네다섯 배는 환한 아이들 미소가 눈에 들어온다. ‘이 정도로 행복했구나’, ‘이때 정말 신났나 보다’. 그러고 다시 사진들을 유심히 보면 어른들 표정도 전반적으로 밝다. 단언컨대 도시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표정들이다.

“이번에 제천에 다녀오면서, 엄마 생각이 많이 났어. 엄마도 나 어릴 적에 이렇게 휴가를 보내지 않았을까? 나도 그때 엄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아. 수박 나눠 먹고, 계곡에서 물놀이하고… 얼마나 시원하고 좋아.” “맞아, 어른들이 오히려 더 신나지 않았을까?” 아내와 이번 휴가를 회상하며 이런 대화를 나눈다.

돌이켜보면, 내가 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했을 때 공모전의 단골 주제 중 하나가 ‘마을 만들기’였다. 마을 위치부터 규모, 운영 방식, 컨셉 등을 모두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도록 맡기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특정 위치를 지정하여 생태 마을이든 도심 재생 마을이든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한 경우도 있었다. 어떤 방식이든 마을은 도시계획가나, 건축가 또는 건축주 개인이 제대로 만들기 쉽지 않다. 게다가 그 마을이 생기와 활력을 갖추는 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결국 마을을 찾고 거기 정착하거나 주기적으로 들르면서 살아가는 사용자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자두마을이 생각나는 걸 보면 아버님의 도전은 우선 성공적으로 보인다.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끼리 다음 가을 방문을 이미 이야기하고 있으니, 이번의 파일럿 프로그램도 적절했던 것 같다. 더불어 나는 그가 말한 ‘삼도사촌’이든 ‘사도삼촌’이든 동의하게 됐다. 어쩌면 도시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시도해 보면 좋을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지 못하고, 인생을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은 고작 몇 차례 일어날까 말까다. 자신의 삶을 좌우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소중한 어린 시절의 기억조차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른다. 많아야 네다섯 번 정도겠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보름달을 바라볼 수 있을까? 기껏해야 스무 번 정도 아닐까. 그러나 사람들은 기회가 무한하다고 여긴다.”

— 영화 <마지막 사랑>의 대사 중. 류이치 사카모토,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에서 재인용

마침 지난 8월 1일, 자두마을에서 본 달은 유난히 더 컸다. 누군가 슈퍼문이라고 했다. 살면서 자연과 가까이 시간을 보내고, 세상사 잠시 잊으며 마냥 웃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이 모든 건 정은의 아버님께서 마을을 만들어주신 덕분이다. 이번 휴가를 같이 보낸 꼬마 손님들은 더 커서, 2023년의 여름을 어떻게 기억할지 궁금하다. 비록 아이들은 일찍 잠드느라 보름달을 보진 못했겠지만, 그래도 상관없겠지. 아이들에겐 여전히 남은 보름달이 많으니까.

Fathers’ Note

💬 육아휴직이라는 작은 쉼표를 찍고 지구 반대편 캐나다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신 정우님을 응원합니다. 아이들에게는 평생 간직할 소중한 시간들이 되겠네요. 햇반의 소진 속도만큼이나 아이들의 성장 속도도 쑥쑥 자라는 시간이 될 겁니다. ‘차로 유지 보조’와 ‘차간 거리 유지’ 기능이 탑재되어 있는 중고차처럼 안전하고 편안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조인드업)

💬 13시간이나 되는 캐나다까지 아이들과의 항공 여정은 어떠셨을지 궁금하네요. 저는 지난 5~6월에 생후 150일 정도 된 첫째 아들과 아내와 함께 처가가 있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의 한 도시에 다녀왔는데 자카르타까지 국제선 7시간과 섬을 건너가는 국내선 1시간의 항공 여정이 긴장이 많이 되더군요. 그래도 아들이 무사히 그 긴 시간을 왕복으로 잘 버텨줘서 다시는 없을 만큼 소중한 추억 여행이 되었습니다. 기간을 정하지 않고 캐나다로 떠나셨다고 하셨는데 가능한 한 오래 머물며 온 가족이 오래도록 공유할 수 있는 소중한 추억 많이 쌓고 돌아오시길 바랄게요. 좋은 편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존재)

님, 오늘 보내드린 편지는 어땠나요? 썬데이 파더스 클럽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제안/피드백/질문이있다면 아래 링크를 통해 알려주세요!

썬데이 파더스 클럽에 보낸 지난 편지가 궁금하다면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썬데이 파더스 클럽의 편지를 혼자 읽기 아깝다면? 썬파클이 필요한 주변 사람에게 아래 구독 링크를 공유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