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이번 레터는 육아휴직을 쓴 아들 셋 아빠 정우님이 보냅니다. 가족들과 함께 외국에서 얼마간 살다 올 생각으로 출국했다고 하는데 준비를 하고 현지에 도착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앞으로 해외에서 보내올 정우님의 육아레터도 많이 기대해주세요 :)

수도권 모 아파트 단지 앞. 이민 가방 4개와 캐리어 2개 그리고 한 가족 앞으로 콜밴이 다가왔다. 약속된 시간보다 약간 이른 시각. 이제 막 해가 뜨고 있었다. 기사는 익숙하게 트렁크를 열어 짐 싣는 것을 도왔다. 아이 셋과 부모는 차에 올랐다. 창문을 열어 아이들의 외할아버지와 한참 인사를 나누었다. 이윽고 콜밴은 출발했다.

이 가족은 막연히 언젠가 외국에서 살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 언젠가는 올해 7월 중순이 되었다. 무섭게 얼어붙은 부동산 시장을 감안하여 살던 집에서는 일찌감치 나왔다. 둘(엄밀히 말하면 셋)이서 시작한 34평 신혼집에서 25평 두 번째 집으로 이사할 때 꽤 많은 짐을 줄였다고 생각했는데 그 짐을 다시 가방 6개로 줄였다. 

공항으로 가는 길이 생경하다. 당분간 보지 못할 풍경을 눈에 담는다. 아이들에게도 창 밖을 좀 보라고 해보지만 늘 그렇듯 아이들은 듣지 않는다. 콜밴 기사는 요새 자동차 옵션이 얼마나 다양하고 좋은지 설명한다. 말로만 듣던 ‘차로 유지 보조’와 ‘차간 거리 유지’ 기능. 기사는 실제로도 액셀이나 브레이크를 거의 밟지 않고 공항에 도착했다. 출국 전 이 두 기능이 없던 자동차 두 대를 중고차매매상사에 넘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공사 카운터에서 짐을 부쳤다. 다행히 어느 가방 하나 23kg을 넘지 않게 잘 싸왔다. 은행 카운터에서 약간의 현금을 현지 통화로 환전했다. 아이들의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가 배웅하러 공항에 왔다. 서둘러 인사를 하고 출국장으로 들어가려는데 할머니가 아빠에게 다가온다.

할머니 : “가서 힘들면 말해”

아빠 : “엄마 그럼..”

할머니 : “돈 빼고”

아빠 : “네”

할머니와 아빠는 짧게 포옹을 하고 작별 인사를 나눴다. 희한한 일이었다. 외국에 나가서 잠깐 살다 오겠노라고 이야기를 했을 때 아이들 외할아버지는 아주 좋은 생각이라며 반기셨고 반대로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는 탐탁지 않아 하셨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출국 날이 다가오자 반응이 조금씩 바뀌었다. 외할아버지는 하루라도 더 있다가 갔으면 하셨고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는 얼른 가라고 하셨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원래 살던 곳과 시차가 13시간이 나는 지구 반대편 캐나다로 떠났다.

몇년 전, 첫째 아이인지 둘째 아이인지 어린이집 졸업식 때였다. 어린이집 밖에 아이들의 졸업 사진이 죽 진열되어 있었고 사진 밑에는 아이들이 부모에게 전하는 짧은 편지들이 놓여있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엄마 아빠 고마워요’ ‘엄마 아빠 사랑해요’를 지나다 한 아이의 편지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거기에는 상당히 또박또박 ‘엄마 아빠 비싸고 좋은 집에 살게 해줘서 감사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헛웃음이 났다. 엄마와 아빠는 분명 그 비싸고 좋은 집에 아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많은 희생을 했을 것이다. 이제 갓 여덟 살이 된 아이가 알 수 있을 정도로.

여기 오려고 팔고 버리고 나눈 가구며 전자제품들을 다시 하나씩 사다 보니까 무슨 짓을 한 건지 싶다. 남들은 직장에서 출장이나 파견, 연수로 외국에 나가는데 아무 생각 없이 육아휴직을 내고 덜렁덜렁 나온 나는 또 무슨 짓을 한 건지 싶다. 이제 한 달 있으면 아내는 학원을,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할 텐데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 아이들이 외국어를 한마디라도 더 하게 하려고 조바심을 내지는 않을까. 두고 온 삶과 마주할 삶에 대해 후회를 하게 되지는 않을까. 행여나 나중에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 비싸고 좋은 외국에서 살게 해줘서 고마워요’라는 편지를 받게 되는 건 아닌가.

첫 며칠은 시차 적응하느라 정신을 못 차렸다. 닷새 정도가 지나 참고 참다가 한인마트를 갔다. 대여섯 번 들었다놨다 한 끝에 12개들이 햇반 한 박스를 샀다. 한나절이 지나니 3개밖에 남지 않았다. 기간을 딱 정해놓고 온 건 아니고 대충 ‘돈 떨어지면 들어가야지’라고 생각하고 왔기에 햇반 소진 속도에 따라 생각보다 귀국이 빨라질 수도 있겠다.

그나마 다행인 건 생전 처음 ‘차로 유지 보조’와 ‘차간 거리 유지’ 기능이 탑재되어 있는 중고차를 구매했다는 것이다. 고마워요 콜밴 기사님. 잘 한번 살아보겠습니다!

Fathers’ Update

지난 레터(76화 여름 휴가를 맞는 자세)에 보내주신 답장을 소개할게요. 

💬이제 본격적인 휴가철이군요. 저희는 붐비지 않을 시기를 생각해 7월 중순쯤 다녀오자! 하고 휴가도 신청을 시작으로 숙박이며 여행지 선정까지 다 했놨었는데!!!  예고되지 않은 아이의 아픔에 그만 다 취소하고 병원과 집을 오가며 휴가를 보냈답니다. (약 5-6일 정도 고열이었는데… 요즘 유행인가 봐요 ㅠㅠ) 모두들 건강하고 안전한, 재미있는 휴가 보내시길 바랍니다! (폭염대피방콕최고)

💬왜 대한민국 휴가가 짠 듯이 7월 마지막 주부터 시작하는지 늘 궁금했는데... 엄마가 되어 처음 맞이한 여름을 보내며, 그리고 정민님의 메일을 읽으며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이와 단둘이 짧게 여행을 다녀왔는데 (미혼) 지인들이 추천해준 곳은 다 별로였어요. 비가 오는 와중에 아이가 있고 유아차도 있으니 제대로 보고 즐길 수가 없었거든요. 비를 맞으며... 괜히 아이를 힘들게 하나 싶어 미안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해가 쨍- 하니 뜨더라고요. 길거리에 멀뚱히 서서 '이젠 어딜 갈까' 하다가 택시 기사님이 추천해주신 곳을 갔는데 예전에 이미 가본 곳이라 리스트에 넣지도 않았거든요. 근데 너무 좋은 거예요! 아이와 함께 가니까 새로운 기분도 들고 (몰랐던 불편함에 대해 인식하기도 하고) 덕분에 아이랑 함께하면서 남들에겐 좋은 것이 지금 우리에겐 아닐 수도 있다는 점, 별로라고 생각했던 것이 지금 우리에겐 최고일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어요. 남은 여름도 무사히 나기를 바라봅니다 🙌 (밤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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