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이번 레터는 아들 셋 아빠 정우님이 보냅니다. 아이가 다쳤을 때 아빠는 ‘왜’라는 질문을 하는 대신 엄마의 얼굴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는데요. 어쩌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여느때와 다름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와 단지 안에 풀어놨다. 킥보드를 신나게 타고 있는 아이들을 쫓아가기도 하고 도망다니기도 하다가 금세 지쳐 벤치에 앉았다. 쉴새 없이 눈으로는 아이들을 쫓고 입으로 조심하라고 말했다. 큰아이가 앞으로 잘 가다가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말을 한다. 아차 싶은 순간 아이는 뒤로 넘어졌다. 아이는 팔꿈치를 부여잡았다. "아빠, 너무 아파서 울고 싶은데 너무 아파서 울음이 나오지 않아"

온라인에 흔하게 도는 짤이 있다. 아이가 다쳤을때.

• 외국 : 오마이 스윗 베이비, 괜찮니? 다친데는 없니? 저런 아팠겠구나! 이리와, 안아줄게. 너는 잘못한 거 없어. 우리 다음부터 조금 더 조심해볼까?
• 우리나라 : 으이그 X 백만번.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이럴 줄 알았어. (등짝 스매시) 이 웬수야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했지!

어찌된 이유인지 그 짧은 순간 그 짤이 생각났다. 머뭇거리면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이럴 때 가장 합리적인 최면은 외국 사람, 아니 외국사람 같은 아내가 되는 것이다. 아내라면 그 짤의 외국사람처럼 반응했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왜'라는 질문을 꾸역꾸역 삼켰다. '왜 킥보드를 탈 때 조심하지 않았어', '왜 킥보드를 타다가 뒤를 돌아봤어', '왜 넘어질때 손으로 짚지 않고 팔꿈치로 넘어졌어' 같은 질문들. 다 아이에게 책임을 물으면서 나의 화를 돋구는 질문들이었다.

마른 세수를 한 번 하고, 한 손은 옆구리에 그리고 다른 손은 이마를 짚으며 아내의 얼굴로 변신했다. "괜찮아? 여기가 아파? 팔을 들 수 있겠어? 주먹을 쥐었다폈다 할 수 있어? 우리 같이 병원에 가볼까?" 그러면서 든 생각. 아이들이 아플 때 엄마를 찾는 이유가 있군.

아이의 일그러진 얼굴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꼈다. 엄살이 아니었다. 얼른 동생들을 집으로 올려보내고 집 앞 정형외과로 갔다. 한참을 기다려 진찰을 받고 엑스레이를 찍었다. 팔꿈치 바로 위에 뼈가 똑 부러졌단다. 성장판이랑 가까워 핀을 꽂아야될 수도 있다고 한다. 대형병원 응급실로 가보라며 소견서를 써준다. 아이는 무서움에 떨고 나는 침이 말랐다.

차 키를 가지러 집에 갔다. 아내는 아이를 안으면서 위로했다. 괜찮을 거라고. 그러면서 침착하게 간식거리를 챙긴다. 응급실에 가면 오래 기다릴 거라며. 나는 답답한 마음에 한시가 급한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며 아이 손을 잡고 나갔다. 아내가 에코백을 들고 문 앞까지 나온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나는 타려다 말고 다시 한번 머뭇거렸다.

"여보, 자기가 갈래?"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아픈 아이를 응급실로 데리고 가고 나면 그 뒤로 펼쳐질 장면들이 어떨지도 모르겠고 내가 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내라면 잘할 텐데. 무엇이든. 역시나 아내는 당장이라도 집을 나설 기세로 본인이 가겠다고 한다. 아차, 싶었다. 이 상황에서도 자신 없는 내 모습이, 그리고 자신이 없어 아내에게 미루고 있는 내 모습이 싫었다. 얼른 엘리베이터에 올라 아이와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은 (내가 보기에는) 평온해 보였다. 다행히 누구도 응급해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렸다. 아이는 팔이 아파서 힘든지 심심해서 힘든지 종종 헷갈릴 정도로 기다렸다. 아내가 챙겨준 에코백에서 바나나를 꺼내 아이와 나눠 먹었다. 엑스레이를 찍고 CT를 찍었다. 역시나 뼈가 부러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젊은 의사는 아이의 팔을 비틀어 뼈를 맞췄다. 아이는 내가 지금껏 아이에게서 들은 가장 큰 비명을 질렀다. 우리는 다시 기다리다 엑스레이 사진을 찍고 나왔다. 아이의 팔에는 깁스 붕대가 감겨있었다. 다행히 핀은 꽂지 않아도 된단다.

견디어낸 아이가 고마웠다. 나는 이 아이만큼 잘 참을 수 있었을까. 아빠와 병원에 간 아이가 고마웠다. 누가 누구의 얼굴을 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빠가 엄마의 얼굴을, 아니 아빠가 더 나은 부모의 얼굴로 아이를 대했다는 점에서 나도 한뼘 성장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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