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레터는 두 돌이 막 지난 송이 아빠 현 님이 보내요. 조금 긴 분량이지만, 육아휴직 1년의 소회를 담았어요. 그동안 틈틈이 찍은 송이 모습을 3분 11초로 압축한 영상도 살펴봐주세요.

+) 드디어 다음주! 썬데이 파더스 클럽의 종이책이 미디어창비를 통해 나와요. 편집부와 다섯 아빠들이 책 제목을 고심하다가 결국 <썬데이 파더스 클럽>으로 지었답니다. 다음주 온라인 서점에 책 <썬데이 파더스 클럽>이 등록되면 특별레터로 공지드릴게요. :)

당신, 나 사랑해?

“당신, 나 사랑해?” 아내는 종종 이렇게 물었다. 직감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답이 하나뿐이라는 걸 안다. 가능하면 경쾌한 톤으로 진심을 담아 너무 늦게 않게 대답할 것. “그럼 사랑하지!”

예전부터 ‘사랑’이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았다. 틀림없고 확실한 걸 선호하는 나에게 이 단어는 애매하고 막연했다. 나 자신도 꼴 보기 싫고 못나 보일 때가 있는데, 어떻게 아내라고 매번 사랑스러울까. (물론 ‘매 순간 배우자가 사랑스럽다’고 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거짓말 멈춰!’라고 감히 외치고 싶다.) 아무리 사이가 좋은 아내라도 괜히 얄미울 때가 있다. 연민을 느끼며 안쓰러울 때도 있다. 그러다 신혼 초반에 불확실한 미래를 놓고 초조해하던 기억, 출산 초반에 고생했던 기억이 떠오르면 애틋해지기도 한다. 이쯤 되면 이 모든 걸 품는 단어가 결국 사랑이라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인다.

아빠, 나 사랑해?

지난 1년 동안 송이의 주양육자로 살았다. 그새 송이는 두 돌을 맞았다. 요즘은 어느 정도 완성형 문장을 구사할 줄도 안다. “아빠, 나 사랑해?” 송이가 이렇게 묻진 않지만, 아이는 매일 매 순간 내게 이 질문을 던졌다. 비록 체구는 매우 작지만, 자신의 모든 손짓 발짓을 써가며. 나와 매우 비슷하게 생긴 구석이 많은, 그러나 엄연히 다른 독립 인격체의 성장을 가까이 지켜보며 사랑, 그리고 시간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육아휴직 초반은 송이에 대한 사랑은커녕, 아내에 대한 사랑까지 돌이켜보게 했다. 2022년 4월, 내가 육아휴직을 시작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을 무렵에 들은 이야기가 기억난다. 돌잔치 촬영 때문에 출장 온 헤어메이크업 전문가가 피로에 찌든 내 얼굴을 컨실러로 열심히 비비며 말했다.

“저희 남편도 육아휴직을 썼어요. 그런데 남편은 그 경험이 최악이었대요. 주변에서 육아휴직을 쓴다고 하면 오히려 말리더라고요. 그때 참 많이 다투기도 했고요. 저도 남편을 좀 더 믿었어야 했는데….”

허허 웃으며 넘겼지만, 그 말을 곱씹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돌잔치를 마친 그날 저녁 크게 다퉜고, 나도 이따금 내 선택을 후회한 적이 있었으니까. 좀처럼 다툴 일 없이 원만하던 부부 사이가 휴직을 기점으로 한동안 흔들렸음을 고백한다. 우리는 자잘한 다툼과 화해를 반복했고, 급기야 ‘이혼’이란 단어가 입 밖으로 튄 적도 있었다. 그러니 육아휴직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각오하지 않으면 함부로 쓰지 말라고 하고 싶다. 대신 각오한다면 두 번은 경험하기 힘든, 밀도 높은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 

다툼의 근본 원인은 주로 상황 탓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누군가를 반복해 돌봐야 하는 상황. 그 상황이 주양육자이자 전업주부의 몸과 마음을 지치게 했다. ‘왜 나만 이 고생을 해야 하지’, ‘왜 아무도 이걸 알려주지 않았지’란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어느덧 억울함과 건강하지 못한 인정 욕구로 쌓였다. 출구도 딱히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상황이 내가 육아휴직을 쓴 동안 갑자기 튀어나온 건 아니었다. 아내가 출산휴가 3개월과 육아휴직 1년을 먼저 쓸 때에도 이 상황은 존재했다. 심지어 내가 싱글일 때 자녀가 둘인 4인 가구의 원가정에서 자라는 동안 전업주부였던 내 어머니께서 겪으신 상황이기도 했다. 이 모든 돌봄과 가사의 전체 사이클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 이토록 책임을 갖고 하나하나 해본 적이 없어서 그 고생이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동안 누군가 나를 위해 해준 것도 모르고 말이다.

“나 정말 열심히 하고 있어. 다른 남자들은 이렇게도 안 하더라. 그렇게 말하면 나 정말 억울해.”

<엄마 휴직을 선언합니다>를 쓴 권주리의 브런치 글에 등장한, 소위 ‘완벽한 아빠’였던 배우자의 항변이다. 나도 휴직 전에는 이런 말을 종종 했다. 아는 게 하나 또 늘었다. 이게 얼마나 용감한 말인지 안다. 그동안 잘 몰라서, 더 솔직히 표현하면 무식해서 이렇게 용감한 말을 했으리라. (이 말을 했던 저자의 배우자도 육아휴직을 썼다고 한다. 그가 주양육자로 거듭나는 걸 보며 모종의 동지애를 느끼며 응원을 보낸다.)

“육아에 보조적 참여자가 아닌, 주 양육자가 되어 경험하는 육아는 센드버드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7년의 시간 동안 주간 100시간에 육박하는 업무시간 겪은 나에게도 곡소리가 나오는 강도의 노동이었다.

왜 그런지를 곱씹어보면, 육아는 ‘자기 통제 가능성’이 결여된 환경에서, 유의미한 관계 발달과 소통이 불가능한 대상에게 수행하는 활동이며, 자신에게 부여하는 의미와 보람을 제외하고는 ‘발전과 성취’라는 피드백이 없는 노동이기 때문에 더 힘겹게 다가왔던 것 같다.”

- 센드버드코리아 이상희 대표의 육아휴직 후기 중

상대를 이해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직접 상대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다. 보조 양육자에 머물렀던 내게 육아휴직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는 ‘독박육아’를 통해 극대화됐다. 극한 환경에 놓여보니 평소 누리던 것의 소중함까지 느꼈다.

멋모르고 송이와 부산에서 단 둘이 한 달을 지낸 경험이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 육아휴직 7개월 차, 송이가 1차 반항기에 접어든 18개월 때였다. 타지에서 독박육아를 자처한 가운데, 바깥 음식에 탈이 난 송이를 돌보며 원룸 오피스텔에서 세끼를 꼬박 해 먹이는 동안 내 양육 스킬은 나날이 늘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광안리 바닷가 바로 앞에 있는 곳에서 지냈는데 나는 물가 가까이 노는 아이를 붙잡는 꿈을 꾸다가 깨곤 했다. 전반적으로 평화로웠지만 현지에서 아이를 돌봐야 하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사실은 은은한 긴장과 스트레스였다. 유일한 해방은 송이가 낮잠 자는 한두 시간, 또는 옆 도시 경주나 거제로 놀러 가는 차 안에서 잠시 잠들 때였다. 주말마다 송이와 나를 보러 아내가 서울에서 내려오는 때면 반가움에 눈물이 절로 났다. 억울함? 인정욕구? 내겐 모두 사치였다. 그저 아내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감사한 순간이었다.

사랑에는 시차가 있다

송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고 육아휴직 후반에 접어들수록, 아내에 대한 이해의 폭은 넓어졌다. 우리는 더 이상 크게 다툴 일도 없었다. 아빠가 정신을 차리든 말든, 본인을 사랑하든 말든, 송이는 눈부시게 성장을 거듭했다. 그런 송이를 관찰하며 자연히 내 관심은 부모와 자식, 그중에서도 ‘아빠와 딸’의 관계에 집중하게 됐다. 휴직 기간 동안 본 영화가 손으로 꼽을 정도지만, 그중 샬롯 웰스의 장편 데뷔작 <애프터썬>은 내 마음을 강하게 움직였다.

<애프터썬>은 평범한 10대 소녀 소피가 그동안 자신에게 소홀했던 아버지와 단둘이 떠난 튀르키예 여행을 다룬다. 30대 소피의 시점과 당시 파편적으로 기록한 캠코더를 통해 재구성하는 형식이 독특한데, 그 시차 때문에 후반부는 무엇이 사실이고 진실인지 모호하다. 영화는 유년기에 보지 못한 걸, 시간이 흐른 뒤 알게 된 소피의 감정을 세심히 묘사한다. 시간은 밤과 낮, 계절 변화를 일찍이 체감한 인간이 만든 중립적 개념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감상적이며 슬픈 감정을 자아낼 수 있는지 깨달았다.

시간의 차이는 많은 걸 바꾼다. 송이의 시간이 더 흐르면, 영화 속 부녀처럼 나도 더 이상 사춘기 딸의 머릿속을 예측하기 힘들 테고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영영 이별하겠지.

“아빠 일어나, 눕지 마.” 돌봄에 지친 내가 먼저 침대에 누울 때 송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내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는, 모든 기억과 미련을 두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때 내 앞에 있을 송이는 어쩌지. 37년 일찍 태어난 나와 37년 늦게 태어난 송이 사이의 숙명이다. 가끔 먼 훗날을 상상하는데 복잡한 심정이 된다.

극복할 수 없는 시차를 기록하기

육아휴직 동안 포기하지 않았던 건 기록이다. 틈틈이 육아일기를 썼다. 스스로 일기를 성실히 쓴 기간은 딱 두 번이다. 한 번은 2015년 모터사이클로 여행하던 6개월. 여행 중 언제든 큰 사고가 날 수 있다는 불안에매일의 기록을 남겼다. 그 일기를 기점으로 나는 직무와 산업을 바꿀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이번 1년이다. 8년 전에 비해 위험 요소나 죽을 뻔한 고비는 없었지만 하루치 쳇바퀴를 돌기 위한 희망이 필요했다. 어제보다 오늘이 낫고 오늘보다 내일이 나을 거란 희망.

성장은 모든 고통을 상쇄한다. 실제로 송이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식물처럼 쑥쑥 크는 아이에 관한 관찰일지라도 필요했다. 나를 위해 쓴 육아일기지만, 37년 시차를 지닌 송이가 언젠가 읽기를 바라는 마음도 컸다.

기록을 위한 몇 가지 장치도 마련했다. ‘썬데이 파더스 클럽’이 그런 면에서는 가장 고맙다. (지금은 연재가 끝났지만) 한동안 월간 <샘터>에 육아일기를 기고하기도 했다. 다른 청탁이 와도 육아 관련 주제에만 거의 응했다. 밑미를 통해 육아일기를 쓰는 리추얼도 운영했다.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며 위안받고 힘을 얻었다. 모임에 꾸준히 참여한 멤버이자, 워킹맘, 양육자이기도 한 재원 님이 댓글로 남긴 내용은 두고두고 간직하고 싶다.

“현 님, 그동안 정말 애쓰셨죠. 송이가 어린이집 가기 전엔, 늘 늦은 밤 필스너 맥주와 함께 올라오던 현 님의 일기, 오늘처럼 새벽의 한복판에 올라오던 일기도, 그리고 여느 육아휴직자처럼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후 낮에 올려주시던 일기까지도 송이가 자라나는 과정을 함께하여 행복했어요! 복직하신 후의 일상도 진심으로 응원해요. 그리고 송이의 두 돌도 축하해요. 🥳”

- 2023년 3월 25일 장재원의 댓글

복직 후

네 번의 계절이 지나 다시 봄이 왔고, 나는 일터로 돌아갔다. ‘돌아왔다’ 대신 ‘돌아갔다’고 쓴 건 내 삶의 중심이 가족에 있기 때문이다.

한때 일을 쉬면 뒤처지지 않을까 고민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성장을 넘어 그 어느 때보다 개인과 사회 구성원으로서 성숙해질 수 있는 시간이라 생각한다. 가장 큰 성과라면, 아이의 성장뿐 아니라 ‘엄마’의 존재를 재발견한 게 아닐까. 엄마가 된 또는 엄마가 될 주변 동료, 후배, 더불어 아내, 그리고 39년 전 나의 어머니, 장모님까지. 덕분에 이해와 감사의 폭이 조금은 더 넓어졌다. 세상 모든 엄마들이 보다 행복하면 좋겠다. 그럼 아이들도, 배우자들도 더불어 행복하지 않을까. Happy wife, happy life. 결혼 후 내 인생의 신조였는데, 업데이트해야겠다. Happy mother, happy 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