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ice

Fathers’ Note

1.

작년 10월 둘째가 태어났다. 그리고 두달 뒤 장인장모님의 도움을 포기하고 서울로 이사했다. 아내는 육아 휴직을 했다. 나도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으므로 가능한 최대한의 시간을 육아에 쏟았다. 첫째 아이는 이사온 동네의 어린이집을 세달 정도 다니다가 새롭게 유치원에 다녔다. 낮잠도 없어지고 친구들도 달라진 환경 탓인지 아이는 학기 초 부쩍 짜증이 늘었다. 아이와의 시간을 더 늘리기로 했다. 매일 하원 후 아이와 1시간씩 유치원 앞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아이는 금세 정서적으로 안정을 찾는 듯 보였다. 

아이 둘을 보는 건 아이 하나를 보는 것과 여러모로 다르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른다. 첫째가 유치원에 있는 동안 나도 집 근처 작업실에서 일을 한다. 하원 시간에 맞춰 집으로 향하고 저녁을 차린다. 요즈음의 우리집은 집안일 대부분을 육아휴직중인 아내가 한다. 요리만 빼고. 요리는 체감상 90%쯤 내가 담당한다. 간단히 조리를 하거나 해둔 음식을 차리는 정도로 끝나기도 하지만 요리를 하는 날도 많다. 내 퇴근이 늦으면 가족의 저녁 식사가 늦어진 셈이다. 불가피하게 저녁 약속이 있는 (아주 드문, 그러니까 몇달에 한 번 있는) 귀가하지 못하는 날을 제외하면 내가 저녁 식사 담당이다. 그러니 저녁 약속도 최대한 잡지 않는다. 

“아, 내 구세주”

퇴근하고 집에 들어선 나를 보고 (거의 매일 저녁) 아내가 하는 말이다. 9개월된 아이를 하루 종일 보고 하원한 첫째까지 상대하는 아내는 저녁 시간이면 녹초가 된다. 그런 아내 입장에서는 육아의 짐을 나눠 들 남편이 구세주처럼 보일 법도 하다. 그런 아내를 생각하니 저녁 약속을 잡겠다는 건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기도 했다. 애초에 저녁에 사람들을 만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가끔 지인들과 연락을 할 때도 ‘애 좀 크면 만나요’라고 하고 기약없는 먼 미래로 만남을 미뤘다. 아이가 태어난 지 9개월이 되었고 나도 사람들을 만나지 않은지 9개월이 된 것이다.

작업실에서 일을 할 때면 늘 영상을 틀어 놓는 편이다. 짧은 유튜브 영상일 때도 있고 영화일 때도 있고 유명 예능일 때도 있다. 혼자 일한지 오래되었지만 적막 속에 일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누군가 옆에서 재잘대주면 조금 덜 외로운 기분이 든다. 처음에는 그저 외롭지 않으려고 틀어놓았던 영상이었는데 어느샌가 영상에 집중력을 빼앗겨 업무 효율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달에 한번 참여하는 코칭 수련을 하고 있다. 비즈니스 코칭을 주제로 수십개의 아티클을 읽고 함께 수련중인 코치님들과 의견을 주고받는다. 그 뒤엔 서로의 고민에 대해 실전처럼 코칭을 진행한다. 고민을 가진 누군가가 자신의 실제 고민을 나누는데 이번에는 내가 고민을 나누기로 했다. ‘영상을 보느라 업무 효율이 떨어진다’는 고민을 털어놨다. 코치님들께서 돌아가며 질문을 주셨다. 얼마간의 대화가 오가다가 한 코치님께서 폐부를 찌르는 듯한 질문을 하셨다. 

“영상이 혁진님을 방해하는건가요? 아니면 혁진님이 영상으로 도망치는건가요?”

‘도망. 도망? 도망이라니’ 한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단어였다. ‘내가? 왜? 무엇으로부터?’ 짐짓 놀란 마음도 잠시, 마음속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영상이 날 방해하는걸까? 아니면 내가 영상으로 도망치고 있는걸까?’ 솔직해지기로 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난 도망치고 있었다. 

“도망치고 있는 것 같아요.”

“무엇으로부터요?”

“제가 하고 있고, 하려는 일들이 너무 많은데 그것들을 다 잘해내야 한다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있는 것 같아요.”

많은 일들을 다 잘해내는 것. 김밥천국에서 파는 수십개의 메뉴가 전부 별점 5개를 맞겠다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잘알면서도 난 그걸 꿈꾸고 있었다. 정작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아이가 등원한 이후부터 하원하기 전까지 8시간 남짓. 그나마도 아이의 문화센터를 같이 가주거나 운동을 하면 일할 시간은 더 줄어드는 상황이었다. 머릿 속에 그리는 완벽한 업무의 마무리 모습에 다가가기에는 너무 많은 과정과 노력이 필요한 걸 알기에 스스로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거였다. 

코칭 수련을 마무리 하고 강의장을 떠나는 찰나. 영상으로 도망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해주셨던 코치님이 한마디 해주셨다. 

“혁진씨, 인생은 길어요.”

3.

아내는 영화를 보는 내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처가 찬스로 아이 둘을 맡기고 극장에 들러 영화 ‘F1’을 보는 내내 아내는 숨을 죽였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가 나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아내만큼은 아니었지만 나 역시 재미있게 봤다. 누군가는 클리쉐 범벅인 영화라고 평하긴 했지만 원래 아는 맛이 더 맛있는 법이다. 

F1 레이싱이 주제인 만큼 자동차 경주 장면이 자주 나온다. 흥미로웠던 건 영화를 보며 F1 대회의 자세한 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중 하나가 피트인이었다. 피트인은 모든 경주차가 반드시 해야 한다. 피트인을 하면 타이어를 교체하는데 두세번의 피트인을 하면서 그때마다 어떤 종류의 타이어로 갈아낄지를 미리 결정한다. 하드 타이어를 끼고 오래 트랙을 돌다가 소프트 타이어로 바꾸고 몇 바퀴를 돌고 다시 빠르게 마지막 피트인을 할 것인지. 피트인도 레이싱 전략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인 것이다. 

“box, box, box!” 

코치진이 무전기를 통해 레이서에게 피트인 박스로 들어오라고 신호를 보낸다. 레이서가 박스 안으로 들어오면 대기하던 십수명의 엔지니어들이 단 몇 초 만에 타이어를 교체한다. 그리고 차는 다시 트랙 안으로 들어간다. 영화를 보며 지금 내 상황을 떠올렸다 .

‘아, 난 지금 피트인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아이를 낳아 기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아이에게 자신의 시간을 오롯이 내준 경험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20대에, 누군가는 30대에 또 누군가는 나처럼 40대에 시간을 쓴다. 레이싱 초반에 피트인을 하는 팀도 있고 레이싱 중반에 피트인을 하는 팀이 있는 것처럼. 중요한 건 누구나 ‘피트인’을 한다는 거다. 타이어를 갈아껴야 레이싱을 이어갈 수 있다. 레이싱에 참여하는 레이서라면 모두에게 적용되는 법칙이다. 아이를 낳았다면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멈추기 위해 피트인을 하는게 아니라 더 빨리 가기 위해 피트인을 한다. 둘째를 키운 9개월의 시간동안, 가끔씩 ‘어쩌면 지금 나에게 찾아올지도 모르는 기회를 놓치게 되는 건 아닐까?’하는 막연한 불안과 조급함에 싸여 있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아이와의 시간이 내 삶의 속도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충만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는 것을. 아이와의 시간을 통해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고 발전하며 더 나은 삶을 살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피트인 박스에서 멈추는 몇 초의 시간 동안 중요한 건 제대로 타이어를 교체하는 일이다. 예정된 새 타이어로 갈아끼고 다시 레이스에 합류해야 한다. 아이와의 함께하는 시간 동안 나의 몸과 마음을 갖추고 가꾸어야 한다. 욕심은 내려놓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만 다시 레이싱에 나설 때, 목표를 향해 돌아보지 않고 달려갈 수 있다. 빠르게 코너를 돌아나가고 직선 주로에서 엑셀을 밟는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들도 내가 모르는 새 한번쯤은 피트인을 하고 나온거다. 그러니 나도 피트인 박스를 빠져나가면 그들처럼 달리고 돌면 된다. 그때를 맞이하기 전 지금의 피트인 시간이 더 귀한 이유다.

F1 레이싱은 트랙을 한바퀴만 도는 대회가 아니다. 정해진 트랙을 수십바퀴를 돈다. 삶도 마찬가지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하루가 반복된다. 코치님이 해주신 ‘인생은 길다’는 말을 떠올린다. 반복되는 하루지만 같은 하루는 없다. 화창한 날씨에 시작했던 레이싱 중간에 비가 오기도 하는 것처럼, 평탄할 것만 같은 인생에 시련이 찾아오기도 한다. 비가 온다고 레이싱을 멈추는 레이서는 없다. 그러니 시련이 온다고, 남들과 다른 타이밍에 피트인 박스에 들어왔다고 낙담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중요한 건 피트인 박스를 빠져나갈 때, ’진짜 레이싱을 할 준비가 되었는가’일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일은 하나다. 나에게 피트인 신호를 보내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반갑게 반응하는 것.

“아빠! box, box, box

Fathers’ Update

지난 레터(147화 반짝반짝 빛나는)에 보내주신 답장을 소개할게요. 고맙습니다.

현님의 인스타를 통해 여행기를 미리 보고 있었지만, 이렇게 또 뉴스레터로 받아 보니 또 다른 재미가 있네요. 읽는 내내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너무 따뜻한 편지였습니다. 저도 모르게 처음으로 후기를 보내봅니다~^^ (진보영)

님, 오늘 보내드린 편지는 어땠나요? 썬데이 파더스 클럽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 제안, 피드백, 질문이 있다면 아래 링크를 통해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