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님 안녕하세요. 각자의 취향을 존중하는 일, 어쩌면 함께하는 시간보다 더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서 더 소중한 이야기가 되지요. 아이에게 밴드 음악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던 규성님의 다짐, 예상과는 달랐지만 결국엔 더 따뜻했던 규성님 가족의 하루가 담긴 오늘의 편지를 읽어보세요.

1.
벌써 6월이다. 하늘도, 햇빛도, 공기도 더는 봄이 아님을 스스로 주장하는 듯하다.  

달력의 앞자리가 바뀔 때면 늘 두 가지 생각이 따라온다. 

“아니 벌써?” - 뭘 했다고 벌써 6월이야..
“후.. 이번 달엔 진짜..” - 운동, 영어공부, 대청소, 안 쓰는 물건 당근하기, 가족행사 추진, 기타 의미있는 무언가(x100)

생각의 끝에 오는 건 대부분 실천보다는 또 한 번의 미루기지만 지난달의 나는 뭔가를 잘못 먹었는지 미루기를 멈추고 어떤 실천을 감행했다. 그리고 그 덕에 새 달의 첫 일요일을 아주 바쁘고 아주 생산적인 움직임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그것도 아침부터가 아닌, 0시 0분부터. 

1.선글라스, 모자, 선크림, 우산, 휴대용 선풍기, 부채
2.바람막이, 여벌옷, 치약, 칫솔, 물티슈
3.얼린 생수 2개와 보냉백, 돗자리, 의자와 테이블
4.보조배터리
5.(비상용) 과자, 사탕, 주스

아내가 공유해 준 메모장의 짐을 다 챙기고 나니 새벽 두 시. 눈을 감았다 뜨니 아침 여덟 시가 조금 넘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식탁으로 나가보니 도시락 네 개가 이미 완성돼 있었고, 그 옆엔 여분의 유부초밥이 쌓여 있었다. 

먹을 것을 책임지기로 한 아내, 먹을 것 외의 모든 것을 챙기기로 한 나, 눈뜨고 양치하기가 유일한 미션이었던 아이. 그렇게 우리의 준비가 끝난 시간은 대략 오전 아홉시. 무려 15시간의 하루가 더 남아 있었다. 

산속 캠핑을 가도, 땅끝 여행을 가도 될 수준의 짐을 트렁크에 가득 싣고 우리가 향한 곳은, 서울재즈페스티벌(이하 서재페)이 열리는 올림픽공원이었다. 

10년 전, 돗자리 하나 들고 단둘이 갔던 그 곳에 이제는 아이와 함께, 양손 가득 짐을 챙겨 가다니. 새삼 부모가 된 나 자신과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준비도, 예상되는 고생도 두세 배였지만, 둘이 아닌 셋이 음악 페스티벌에 간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대단한 성취라 생각됐다. 그리고 나만의 또 다른 목표달성이 곧 있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설레었다.

2.

“아빠, 티니핑 틀어줘”
“응, 슈팅스타 틀어줄까?”
“아니, 슈팅스타 말고 슈링스타야 아빠”
“(...)”

체감적으로 얼리버드보다 두 배 비싼 정가로 서재페 티켓을 충동구매한 명분은 가족과의 행복한 시간이었지만, 개인적으론 더 중요한 목표가 있었다. 매일 티니핑송을 찾는 아이에게 더 좋은 밴드 음악의 세계가 있다는 걸 경험시켜 주고 싶어서. 그러면 매일 아침 출근 겸 등원길에 ‘티니티니 티니 티니핑’ 무한 루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서…

포켓몬과 세일러문의 도파민을 절묘하게 섞어 놓은 이 핑크빛 캐릭터가 우리 집에 침투한 건 올해 초 부터였다. 시작은 아주 작고 저렴한 스티커였는데 아이는 어느 순간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에 빠져들었고, 서서히 (부모들의 파산을 유도한다는) 랜덤 뽑기 키링과 장난감에 손을 대더니, 이젠 어린이집 수저통과 젓가락까지 같은 캐릭터가 아니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스티커는 떼면 되니까, 장난감과 젓가락은 내게 아니니까 외면할 수 있었지만, 음악은 달랐다. 

평일 이십여 분의 등원길과 주말 이동시간마다 틀어달라는 이 만화 주제가는 수백번을 들어도 이상하리만큼 적응도, 외면도 쉽지 않아 운전 중 내내 정신이 혼미해진다. 대학생 때부터 외국 밴드 음악에 심취해 졸업할 때까지 밴드부 활동을 하고, 음악 사대주의처럼 서양 음악만 듣는 외골수*에게 이 수많은 효과음과 성우 목소리로 채워진 핑크빛 노래는 차마 음악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정체불명의 소리일 뿐이다… *한 가지에만 매달리는, 편협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 한국 음악을 멀리하고 팝송 및 외국 음악만 고집하는 사람을 일컫기도 한다.

특히 아이를 등원시키고 차에 다시 탔는데 자동으로 티니핑 노래가 재생될 때는 실존적 위기를 겪는다. 함께 있을 땐 사랑으로 듣지만(그렇게 우리는 부모가 된다...), 혼자 있을 땐 정말이지 5초도 듣기 힘들어 황급히 다른 밴드 앨범이나 팝송으로 바꾸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서재페는, 한 줄기 빛이었다. 아이의 편협한 음악 세계를 넓히고, 음악적 감각을 고취시키며, 핑크색 음악만 듣는 일상에서 다양한 색깔의 음악을 경험하게 할 절호의 기회. 그렇게 나는 혼자만의 상상을 펼치며 두 장에 삼십여만원이 넘는 티켓을 결제했다. 

자신 있었다. 내가 처음 밴드 공연을 봤을 때 느꼈던 희열을 아이도 느낄 거라는 확신. 눈앞에서 연주되고 편집 없이 울리는 라이브 음악의 감동을 아이도 똑같이 느낄 거라는 확신. 아티스트의 이름은 몰라도, 들었던 음악은 잊지 못할 거라는 확신. 

하지만 이 모든 확신이, 자신감이 아닌 자만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3.

올림픽공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공연장 가까운 주차장은 만차였고, 티켓을 받기 위한 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길었다. 나름 아침부터 서둘러 공연 시작 한 시간을 앞두고 도착했지만, 이 페스티벌을 예매한 사람들은 분명 우리보다 가까운 곳에 살거나 훨씬 부지런한 싱글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입장 줄보다 더 큰 복병은 더위였다. 우산 없이 서 있기엔 견딜 수 없을 만큼 여름 햇빛은 강력했고, 나와 아내는 번갈아 가며 아이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상태를 살폈다. 아이가 우리 셋 중 가장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이자, 뜨거운 바닥과 가장 가까운 높이에서 햇빛을 견뎌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거의 한 시간 만에 입장에 성공한 우리는 바로 잔디광장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돗자리를 깔고 야심차게 준비한 그라운드 체어와 테이블까지 셋팅한 후 자리에 앉는 순간,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이곳에 10분 이상 앉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우산으로 해를 가리며 앉아 있었지만, 직사광선은 그대로 느껴졌고, 사우나 같은 열기에 음악에 집중하는 건 도무지 불가능했다.  

우리는 마치 도피하듯 그늘을 찾아 헤맸고, 겨우 자리를 확보한 뒤에는 무대가 잘 보이지 않는 아쉬움은 접어둔채 해를 피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도시락으로 허기를 채웠다. 허기를 채운 후엔 어떤 공연을 볼지 고민했지만, 야외무대는 더위와 햇빛이, 실내무대는 지나치게 큰 스피커 소리가 걱정되어 진퇴양난이었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길 서너 시간.
제대로 몰입해서 감상한 공연은 하나도 없었다.

라이브 음악의 감동을 전해주겠다던 목표는 이미 희미해졌고, 우리는 생존을 위해 음식과 음료를 수시로 먹으며 움직였다. 무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사실상 BGM이었다. 아이에게 티니핑보다 넓은 음악 세계를 경험시키겠다던 나의 호기로운 계획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수포로 돌아가고 있었다.

오후 다섯시 반쯤. 해가 살짝 기울기 시작하더니 기적처럼 햇살이 뜨겁지 않고 따스해졌다. 잔디광장에서 우산을 쓰고 있던 사람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씩 우산을 접었고, 무대에서는 새로운 공연이 시작됐다. 10년 전, 같은 장소에서 아내와 함께 봤던 2인조 남성 어쿠스틱 밴드의 무대였다. 

통기타 소리와 함께 보컬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순간, 앞서 힘들었던 모든 것들이 잊혀지고 밴드 공연을 보러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속까지 건조해졌던 영혼이 순식간에 말랑말랑해지고 살아 숨쉬는 느낌이었다. 

놀라운 건 아이도 음악에 집중하더니, 리듬에 맞춰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는 것. 정말 신났는지 음료수를 돗자리에 엎질러 반자발적으로 스탠딩 구역에 나가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더 신나게, 제대로 공연을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 시간여의 공연을 첫 곡부터 끝 곡까지 빈틈없이 즐겼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뻔한 말이, 그 순간 만큼은 조금도 뻔하지 않을 정도로, 몸을 흔들며 함께 즐긴 그 순간 순간은 정말 특별했고, 행복 그 자체였다.  

4.

취향의 확장을 명분 삼아 갔던 공연이었지만, 막상 진짜 공연을 즐기게 되었을 땐 아이의 음악 취향이 달라지는 건 더는 내 목표가 아니었다. 

그저 같은 공간에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같이 듣고, 함께 추억을 쌓는 그 순간의 만족감이 너무 커서, 더는 바랄 것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등원길, 나는 모르는척 어제 들었던 밴드의 노래를 틀었고, 아이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그 밴드 음악 멜로디 위에 티니핑 노래 가사를 얹어 혼자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아이의 취향은 그제와 어제, 그리고 오늘도 변하지 않았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달라진 게 있다면 내가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티니핑 노래를 듣게 되었다는 것. 

내 아이가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같이 즐겨주었을 때 내가 행복했던 것처럼, 아이도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누군가 함께 좋아해주면 더 신나고 행복할 거란 생각이 들고 나니, 티니핑에 대한 마음이 덜 뾰족해졌다.  

결국 아이의 취향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그 취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나의 좁은 마음이 문제라면 문제였을 뿐. 

아주 가끔씩만, 10번의 한 번 정도만 아이도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같이 들어주고, 1년에 한 번 정도 내가 가고 싶은 음악 페스티벌에 같이 가준다면 그걸로 됐다. 

각자의 취향은 저마다의 이유로 훌륭하고, 훌륭한 밴드 음악은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아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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