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님 안녕하세요. 어린이날 연휴는 잘 보내셨나요? 아이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신 분도, 긴 돌봄 시간으로 지치신 분도, 명절처럼 가정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다하신 분도 계셨을 것 같아요. 어떤 나날이었든 모두 고생 많으셨고, 남은 5월은 부디 평안한 시간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이번 편지 속 규성님은 지난 어린이날에 모처럼의 ‘심심함’을 느꼈다고 하는데요, 어떤 이야기인지 들어볼까요?

1.

5월 2일 금요일 저녁. 안경점에 미리 주문한 렌즈를 찾고, 아내와 함께 차를 주차한 곳으로 향하려 지하철 통로를 지나던 중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출구 앞, 그 속에서 단 둘이 손을 잡고 걷고 있는데 문득 낯선 기분이 들었다.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행복감?
편안함?
도파민?
세로토닌?

어쨌든 평일에는 느껴본 적 없는 좋은 기분이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아이는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외할머니 댁에 있었고 우리 부부는 자동으로 3박 4일의 자유를 얻은 상태였다. 오늘이 그 첫날이었다.  

평소 같으면 아이를 하원시키고, 집에 와서 목욕시키고, 재우느라 분주했을 시간에 쇼핑몰에서 옷을 사고, 안경점에서 렌즈를 찾고, 여유롭게 주차장을 오가고 있다니. 장모님이 계신 곳을 향해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원래는 저녁까지 평소 못 가던 곳에 들러 바깥 시간을 만끽할 계획이었지만, 오랜만에 한 오프라인 쇼핑에서 예상보다 많은 지출을 한 우리는 계획을 접고 집으로 돌아와 라면을 끓였다.

인스턴트 음식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밀린 유튜브와 OTT 시리즈를 보다가,
생각보다 일찍 잠이 들었지만, 그게 럭셔리였다. 

우리에겐 아직 3일이 더 있었기에 아쉬움도 없었다.

2.

둘째 날 아침, 침대에서 눈을 떴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를 깨우는 사람도, 눈치 주는 사람도 없었다. 더 누워 있고 싶으면 더 누워 있을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아무 계획도 없던 하루. 오전 10시쯤, 전날부터 건조기에 머물러 있던 빨래를 꺼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빨래를 개다가 집안이 너무 조용해 음악을 틀었다. 평소엔 조용한 걸 좋아하지만, 그 조용함이 아이의 부재 때문이라 생각하니 괜히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아이가 영상 보던 아이패드를 스피커 옆으로 가져와 연결하고 음악 앱을 켰다. 쓰는 장소와 용도만 달라졌을 뿐인데, 갑자기 집안의 요물같던 물건이 보물처럼 기능하는 듯 했다. 

빨래를 다 갠 뒤, 문득 보고 싶은 영화가 떠올라 검색해봤다. 3월에 개봉한, 교황 선종과 관련된 영화였는데 다행히 아직 상영 중이었다. 아내를 졸라 오후 4시 명동에 위치한 극장에 예매를 하고 시간에 맞춰 나섰다. 분명 어제와 비슷한 여유였지만, 그새 익숙해진 건지 이상하게 어제만큼의 설렘이나 즐거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 주점을 겸한 식당에서 저녁과 반주를 하고 홍제천 산책로를 걸었다. 저녁먹고 산책하기라는 이 간단한 활동을 왜 그동안 못했을까. 잠시 생각했다. 아내는 산책을 하며 아이 이야기를 했다. 장모님 카톡 프로필을 장식한 아이 사진과 영상을 넘겨 보고, 사진 앱에 저장된 영유아 시절 아이 사진을 보며 과거를 추억했다. 나는 겉으론 주책이라며 놀렸지만, 막상 그 사진들을 보니 마음이 애틋해졌다. 

아이 사진은 아이랑 떨어져 있을 때 더 예뻐 보인다는 진리를 새삼 떠올렸다. 

3.

셋째 날 아침, 아내의 몸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전날 영화관에서부터 컨디션이 안 좋더니, 소화 안된 저녁에 찬바람까지 쐬서인지 탈이 난 모양이었다. 원래는 새벽같이 차를 몰고 대구에 있는 수목원을 당일치기로 다녀올 계획이었지만, 신발을 신는 것조차 무리처럼 보였다.

아내는 하루 종일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고, 나도 이상하게 계속 잠이 쏟아졌다. 그렇게 우리는 아침잠을 낮까지, 낮잠을 밤까지 이어 잤다. 해가 지고 집 안이 어둑해질 때까지, 집은 인기척 하나 없는 빈집처럼 적막했다. 

잠에서 깨 핸드폰을 열었는데 아무런 알림도 이벤트도 떠 있지 않았다. 그 흔한 스팸 문자나 메일조차 없었다. 아무런 자극도 변화도 없는 시간은 이상하리만큼 빠르게, 그리고 조용히 흘러갔다. 

4.

넷째 날 아침, ‘아직 3일의 시간이 더 있다’고 생각했던 게 무색하게 어느새 마지막 날이 되었다. 

다행히 아내는 기력을 되찾았고, 나도 동기화된 몸처럼 푹 자서 컨디션이 좋았다.

연휴 초반 점찍어 뒀던 브런치 가게와 전시가 있어 아내에게 이른 데이트를 제안하고 샤워를 시작했다. 

십 분쯤 지났을까. 문을 닫아도 들리던 장난꾸러기의 소리가 없는 게, 새삼 심심하게 느껴졌다. 요즘은 좀 컸다고 덜 그러지만, 몇 달 전만 해도 샤워만 시작하면 어느 순간 우당탕탕 뛰어오며 문을 벌컥 열곤 했었다. 매번 당황스럽기만 했던 그 고약한 장난이 그립다니, 벌써 그런 시간이 와버린 걸까.

브런치 가게에 도착하니 웨이팅이 여섯 명.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바로 발길을 돌렸다. 하루이틀 전만 해도 기다릴 인내심이 있었지만, 아이가 없는 마지막 날, 한 시간의 기회비용은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전시 공간 인근에 있는, 기다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곧바로 전시를 보러 갔다. 예약시 ‘전체관람가’라는 말과 달리 전시는 어둡고 심오한 시청각 자극으로 가득했다. 전시를 보는 내내 아내와 나는 ‘이현이랑 같이 안 오길 다행이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카페에 들른 순간, 반가운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아들이 보고싶은 아빠, 엄마의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대뜸 “내일 점심 말고 저녁에 데리러 와”라고 명령을 했다. 아빠 엄마는 준비되지 않은 자유를 누리느라 벌써부터 적당한 구속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는데, 아이의 자유 시간은 아직 한참 모자란 듯했다. 

마지막 자유의 밤을 의미 있게 보낼 방법을 고민하다 큰 소리로 봐야 제 맛인 영화 한 편을 보기로 했다. 제목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2022년에 개봉한 작은 독립 영화였지만 아카데미를 휩쓸며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정확한 줄거리는 몰랐지만, ‘새롭고 재밌는 코믹 액션 영화겠지’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는데, 영화는 두 시간 동안 정신없이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던졌다.  

여러 멀티버스를 오가며 다양한 인생을 경험하는 엄마와, 그런 엄마에게 혼란과 시련을 안기는 딸. 그럼에도 결국 딸과 함께 있는 이 세계를 선택하는 엄마. 그 복잡한 가족 이야기 속에서, 우리 둘만의 마지막 밤은 자연스럽게 떨어져 있는 단 한 사람을 떠올리며 끝났다.

그리고 그 존재는 우리에게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라는 말로 정리되었다.

5.

아이를 카시트에 태우고, 집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위에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인생을 선택할 수 있을까? 밥 먹고 산책할 여유도, 듣고 싶은 음악을 듣고, 보고 싶은 걸 볼 자유도, 잠들고 싶을 때 자고, 씻고 싶을 때 씻을 자유도 없지만, 이 인생만이 지금의 아이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세계라면, 다른 선택지는 없지 않을까.  

아이랑 함께 산다는 건 산만하고, 소란스럽고, 안정적이거나 질서정연한 삶과는 거리가 멀지만, 역설적으로 그 요란함과 불완전함, 예측 불가함이 주는 역동은 부모의 삶을 이끄는 원동력이자 특별한 에너지가 되곤 한다. 

아이에게서 오는 행복을 말로 정리하거나 객관화 한다는 건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어떤 객관적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오직 당사자만이 느낄 수 있는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건, 그 존재 때문에 지금의 생을 그 어떤 화려하거나 세련된 인생과도 바꾸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아이뿐 아니라 세상 모든 게 비슷하지 않을까. 가치있고 특별한 것일 수록 주관적 영역에 있기 마련이니까. 아빠가 쉬는 동안, 본인의 소중함을 이렇게까지 되새기고, 샤워실 문을 여는 장난까지 그리워했다는 걸 아이는 알까.  

너무 티 내진 말자. 소란스러움 속에 있다 보면, 다시 지난 3박 4일이 그리워질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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