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님 안녕하세요. 이번 편지는 지난 번 나이 드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썼던 규성님이 보냅니다. 지난 번 편지가 또 다른 생각의 나비효과를 불러왔다고 하는데요, 과연 어떤 이야기일까요?

1.

나이 드는 것에 대한 글을 쓴 이후, SNS의 알고리즘이 자꾸만 나이 관련 콘텐츠를 추천 상단에 올려놓는다. [서울 지옥철을 타는 친구들이 빨리 늙는 이유], [노화 급행열차 타게 되는 습관들], 내셔널지오그래픽의 [노화와 퇴화, 그리고 죽음] 등등. 매일 내 손짓 하나하나까지 기억하는 알고리즘이 나를 노화에 대한 논문을 쓰는 대학원생이나 피부, 건강에 관심 많은 소비자이자 광고 타겟으로 분류한 건 아닐지 합리적 의심까지 들 정도다.

알고리즘 정상화를 위해 웬만한 추천 콘텐츠를 휙휙 건너뛰다가 뉴스 하나에 엄지손가락이 머물렀다.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를 좋아하거나 익숙해하면 요즘 세대가 아니라는 기사였다. 자세히 보니 미국 Z세대들은 20년도 넘은 옛날 영화 해리 포터에 열광하고 덕질하는게 밀레니얼 세대의 특징이고 이를 촌스럽다고 생각한다는 내용이었다. 

얼마 전 크리스마스에도 아내와 같이 시리즈의 1편인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재밌게 봤던 나로선 의문의 1패를 느꼈고, ‘밀레니얼’이란 세대가 더는 최신 세대에 끼지 못한다는 사실에 괜스레 위축되는 마음마저 들었다. (참고로 내 아내가 나보다 해리포터를 훨씬 좋아한다)

해리 포터를 한 번 더 떠올리게 된 것은 지난 설 연휴, 장모님의 은혜로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면서 점심을 먹기 위해 들린 단골 칼국수 집에서였다. 최근까지 아이랑 함께 오던 맛집에서 혼밥을 해서 너무 좋았다 하던 중에 옆 테이블의 대화에서 뭔가 해리 포터처럼 익숙하면서도 낯선 개념이 다소 자극적인 방식으로 들려왔다.  

“스읍 김철수(가명, 기억이 안 남), 뭐하는 거야. 너 생각하는 의자에 갈래?”

“(잠시 후, 아이가 음식을 먹고 있을 때) 철수야. 너 집에 가면 생각하는 의자에 갈 거야. 알겠지?”

생각하는 의자… 

생각 의자… 

생각하는 의자?

아빠엄마의 말과 태도도, 겨우 돌 때쯤 되어 보이는 아이의 모습도, 집이 아닌 식당에서 생각하는 의자를 말하는 것도 모두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생각하는 의자’란 단어가 유독 뇌리에 꽂혀 한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연휴가 끝나고 현생으로 돌아와 퇴근 후 밤 9시에 귀가한 어느 날. 평소 같으면 목욕*까지 마치고 뽀로로 한 편을 보고 있어야 할 아이가 잠옷이 아닌 등원했을 때 옷 그대로 거실에서 놀고 있었다. 바로 (가장 중요한) 아내의 상태를 보니 퇴근은 했지만, 영혼을 회사에 두고 온 사람처럼 식탁에서 노트북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못다 한 회사 일을 하는 상황이었다. 등원시키기보다 어려운 목욕 시키기를 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사실상 5분 샤워이지만 편의상 목욕을 한다고 통칭하고 있다. 

“심이현. 목욕하자.” 

“늦었어. 이제 해야 해.”

“뽀로로 안 보고 싶어? 지금 안 씻으면 뽀로로 못 본다?”

“얼른, 얼르으으으은!”

“어서 와. 곧 10시야. 너무 늦었어..”

잔소리를 한 오십 번 정도 했을 때쯤이었을까. 나의 인내심이 바닥에 가까워진 걸 눈치챘는지 아이가 화장실 앞으로 와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이제 샤워기를 틀면 되겠구나 싶었는데 아이가 다시 도망을 간다. 옷을 반쯤 벗고 이불 속에 숨거나 침대에 가서 숨바꼭질하는, 평일에 아빠와 할 수 있는 유일한 놀이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겉옷 상의, 겉옷 하의, 내복 상의, 내복 하의, 속옷, 양말 하나씩 벗을 때마다 도망친다..)

평소같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그날의 에너지를 회사와 출퇴근길에 다 써버린 나는 더 참을 수가 없어 무력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인간의 자발적 동기에 대한 믿음을 잠시 접고, 옷을 벗다가 만 채로 침대에 숨은 아이 몸을 손으로 번쩍 들어 올려 강제로 화장실 욕조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이쯤 되면 포기할 법도 한데, 나의 상태를 알 턱이 없는 아이는 여전히 장난을 멈추고 싶어하지 않았다. 욕조 안에서 내가 직접 바지와 양말을 벗기는 순간까지 몸을 흔들며 장난을 쳤고 나는 결국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모습으로 말이다. 

“장난 그만!!”

“장난 좀 그만해!”

2.

오은영 박사, 삼둥이 등의 프로그램을 보며 얼핏 알고만 있던 생각하는 의자의 의미를 찾아보니 부제로 타임아웃(time-out)이라는 영어단어가 붙어있다. 연달아 타임아웃의 정의를 찾아보면 '농구, 배구 등의 경기에서 경기를 일시 중지시켜 선수의 교체, 휴식, 작전의 협의 등을 행하도록 규정된 짧은 시간'이라는 뜻이 적혀있다. ‘일시중지’, ‘교체’, ‘휴식’. 모두 육아에도, 바쁜 일상생활에도 필요한 말이다. 

전후반이 나뉘는 축구 경기나 타임아웃이 많은 농구 경기를 보면 짧은 타임아웃만으로도 경기의 흐름이 바뀌는 것을 자주 본다. 생각하는 의자의 본질도 이처럼 짧은 시간을 통해 아이들의 생각을 환기하고 나쁜 충동과 국면을 긍정적으로 전환하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생각 의자’, ‘반성 의자’란 단어로 구전되면서 단순히 체벌과 회초리를 대체할 수 있는 수단처럼, 보기에 좋고 흔적이 남지 않는 체벌처럼 쓰였다는 느낌이 든다.

육아를 하다 보면 스스로 생각하는 의자에 앉아 타임아웃을 하고 싶을 때가 많다. 길고 긴 독박육아를 할 때, 퇴근 후 잠시 앉아있을 시간도 없이 바로 육아와 집안일을 해야될 때, 집에 와서도 아이를 못 보고 무언가의 이유로 휴대폰만 붙잡고 있을 때(휴대폰 할 시간은 항상 있는데 앉아서 생각할 시간은 왜 늘 부족한 것인가), 어둠의 마법에 걸린 것처럼 몸 상태가 안 좋은데 돌봄 노동을 피할 수 없을 때 등등. 만약 육아 커뮤니티에 질문을 올리면 아마 타임아웃이 필요한 100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찌보면 생각하는 의자는 아이들보다 어른인 양육자가 더 많이 앉아야 할 의자일 수도 있다. 단절과 격리를 통해 잃어버린 본성과 인간성을 되찾을 수 있고, AI나 휴대폰에 의존하지 않는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며, 선수교체까지는 어렵지만 적어도 더 슬기로운 작전을 짤 수 있는 의자니까. 이왕이면 내가 좋아하는 유명한 가구 브랜드의 의자면 좋겠지만, 작은 스툴만 되어도 역시 그 역할을 할 수 있으니까. (앞으로 목욕시킬 때만큼은 화장실 문 앞에 의자를 하나 갖다 놔야 할 것 같다. 잘못했어 아들)

한편으론 직업이 기획자이다 보니 ‘생각하는 의자’란 단어를 두고 쓸데없는 상상을 해본다. 만약 이름이 ‘타임아웃 의자’로 불렸다면 과연 이처럼 몇십 년 동안 회자되는 단어가 될 수 있었을까?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케이롤링이 만약 20년 전 한국에서 육아를 했다면, 해리 포터의 여러 시리즈 중에 <해리 포터와 생각하는 의자> 편이 만약 그 당시 출간되거나 영화로 개봉했었다면 소위 대박이 나지 않았을까?(뭐라도 좋으니 속편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 의자에 앉는 사람이 어른들이면 더 재밌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앉히고 싶은 어른들이 참 많을 텐데. 생각하는 의자에 앉혀서 바뀔 시간을 주고 싶은 사람들이 참 많은데..

아무튼, 칼국수 집에서 혼난 아이도, 나의 아들도 모쪼록 아빠 엄마의 과한 말과 행동을 빨리 잊을 수 있으면 좋겠다. 만약 마음속에 무언가가 남았다면, 나중에 어른이 되어 이렇게 합리화를 했으면 좋겠다. 아빠 엄마의 생각이 짧아서 그랬던 거라고, 생각할 시간이 더 있었으면 그러지 않았을 거라고. 진짜 생각하는 의자에 앉아본 적이 없어서, 다른 기능의 짝퉁 의자가 너무 많이 유통되어서 그런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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