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안녕하세요, 님. 이번 편지는 육아휴직 중인 정우님이 보냅니다. 정우님이 지난 편지에서 자는 아이들의 다리를 만져 보고 춥지는 않은지, 머리를 만져보고 덥지는 않은지 가늠한다고 썼었죠. 이제는 쑥쑥 커가는 아이들을 보고 '이게 다 얼마'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는데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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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몇 년 전, 회사에서 회의를 마치고 사담을 나누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한창 “이분은 아들이 셋입니다 (짠!)”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를 당하던 시절이었다. 대다수의 반응은 마치 들으면 안 될 걸 들은 것처럼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진다. 감탄인지 위로인지 모를 “애국자시네요”, “대단하십니다”, “힘드시겠어요, 아내분이” 등의 반응에도 익숙해질 무렵에 난데없이 부자라니? 내가 부자가 아니면 어쩌려고 저런 말을? 하긴 아버지와 아들들이니 부자이긴 하지. 하지만 눈치로 보아 그분이 말한 부자는 썬데이 파더스 클럽 멤버인 정민 님의 초창기 레터에 등장한 ‘설마 얘가 벌써 돈의 맛을?’에서 말한 바로 그 ‘돈의 맛’을 의미하고 있었다. 아뿔싸. 내가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치밀하게 밖에서 스타벅스 커피 안 사 오고 회사 탕비실 커피만 마셨는데. 결국 이렇게 들키고 말았다(는 결말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분의 논리는 대강 아래와 같지 않았을까 추측했다.

• 아이가 자라는 데 돈이 많이 든다.
• 박정우는 아이가 셋이다.
• 그러므로 박정우는 부자이다.

대충 생각해 봐도 빈틈이 많은 추론이다. 당시에는 첫 번째 전제 ‘아이가 자라는 데 돈이 많이 든다’부터 동의하기 어려웠다. 이유식을 먹게 된 지도 꽤 되었었고 대소변도 가리게 되면서 분유와 기저귀 비용에서 자유로워졌다. 장난감은 동네 육아종합지원센터에서, 책은 도서관에서 빌렸다. 어린이집에 따로 내는 비용이 극히 적었다. 정부와 지자체가 지원하는 이런저런 바우처나 수당들도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 추론은 ‘박정우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변수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논리적이지 않다.

한참을 잊고 지냈던 “부자네”라는 말이 어쩌다 다시 떠올랐을까. 한적한 주말, 동네의 어느 도서관 옆 분식집이었다. 우리 가족 다섯 명은 떡볶이와 김밥을 맛있게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얼마예요?”

“네, 5만 2천 원입니다.”

“네?”

“5만 2천 원이요.”

거짓말 조금 보태서 그 순간 분식집 할머니의 얼굴과 몇 년 전 “부자네” 그분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가 일어난 자리엔 떡볶이, 라볶이, 김밥, 튀김, 어묵의 흔적이 있었다. 아참, 그럼 그렇지. 우리가 떡볶이랑 김밥만 먹은 게 아니었지. 그래도 이게 말이 되나 분식집에서 5만 원이라니? 아무래도 계산이 안 맞는데. 아, 순대도 먹었구나. 저런, 음료수도 먹었고. 잔돈을 거슬러 받을 줄 알고 5만 원짜리 지폐를 들고 있던 손이 무안해졌다. 주섬주섬 천원짜리를 두 장 더 꺼내 계산을 했다. ‘물가 무섭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국밥집을 갈걸’, ‘아니지, 아내는 국밥을 별로 안 좋아하잖아’, ‘얘네 조금 있으면 금방 또 배고프다고 할 텐데’. 가게를 나오면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젖병으로 양분을 보충하던 아이들이 언제부턴가 숟가락을 들었다. 내 밥그릇에서 몇 숟가락 덜어서 국물에 말아 주면 충분했던 아이들은 한 그릇으로 셋이 나눠 먹다, 둘이 나눠 먹다, 이제는 각자 한 그릇씩 비운다. 그 와중에 입맛도 다 달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는 전광판을 노려보다가 자신의주문 번호가 뜨면 우동 코너, 중식 코너, 경양식 코너, 국밥 코너로 뿔뿔이 흩어졌다가 모인다. 하긴 얼마 전에 이케아 푸드 코트에서 트롤리에 트레이를 3층으로 쌓아서 음식으로 가득 채웠지. 이래서 나의 부모님은 어릴 적 우리 집 가훈을 ‘밥값을 하자’라고 지으셨던 걸까.

밖에서 먹는 밥은 그렇다고 치자. 방학이 한창일 땐 하루 세 끼에 중간중간 간식까지 야무지게 먹는 아이들이 있다 보니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마다 현관문 앞에 전날 주문한 식자재가 놓여 있었다. 기저귀, 분유, 물티슈가 쌀, 고기, 채소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건 새벽 배송 업체들이다. 현관문에 붙이는 스티커만 ‘아기가 자고 있어요’ 대신 ‘인간들이 먹고 있어요’로 바꾸면 될 텐데.

아이들이 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면? 아이들이 각자 방을 달라고 하면? 대학교 학비는? 결혼 비용은? 깊은 수렁에 빠지기 직전 정신을 차리고 당장 눈앞의 수렁에 집중한다. 이번 봄 방학은 어떡하지? 항공권 가격비교 사이트 구경하기가 취미인 나는 ‘오, 장거리 항공권이 80만 원이면 훌륭한데?’ 하다가도 인원을 5명으로 바꾸면 보이는 총액에 좌절하고 만다. 어디 항공권뿐인가. 호텔도 2인실이면 20만 원 정도에 괜찮은 객실을 예약할 수 있다. 그런데 인원을 5명으로 바꾸는 순간 ‘저희 사이트에서 매진되었어요!’라고 뜨거나 그나마 있는 방들은 왜 갑자기 120만 원인데. 어떻게 객실 타입이 디럭스 더블에서 갑자기 프레지덴셜 스위트가 되는 거냐고 (오열).

설이 지나고 아이들과 서점에 갔다. 아이들은 신나게 책을 몇 권씩 골라 손에 들었다. 계산대로 가기 전 “오늘은 너네가 받은 세뱃돈으로 계산할 거야”라고 말하자마자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손에 든 책들을 동시에 내려놓았다. 내 카드로 계산을 하면서 생각했다. ‘그래. 나는 어차피 부자 되긴 글렀으니 너희 셋이라도 부자가 되어라.’

“부자네”라고 말한 그분은 이미 아이들이 다 컸고 어디 어디에 상가가 몇 개 있어서 월세를 얼마 받는다는 이야기를 나중에서야 들었다. 문득 그분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궁금해하지 않아도 잘 지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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