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안녕하세요, 님. 이번 편지는 육아휴직 중인 정우님이 보냅니다. 아내가 얼마 전부터 출근을 하기 시작하면서 역할이 역전되었다고 하는데요. 균형을 잘 찾아가고 있을까요? 얼마 전에 개설한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서도 비슷한 주제로 많은 이야기가 오갔어요.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암막 커튼 사이로 아침이 희미하게 들어온다. 뒤척이다가 몸을 일으킨다. 엉거주춤 아이들 방으로 가서 커튼을 열어젖힌다.

“굳모닝” 아침 인사를 한다. 아이들의 원망과 짜증 섞인 앓는 소리를 뒤로하고 주방으로 향한다. 아이들은 어느덧 스스로 서랍을 열어 오늘 입을 옷을 골라 입을 수 있다. 토스터에 식빵을 넣고 크림치즈, 누텔라, 땅콩버터, 딸기잼 그리고 우유를 꺼낸다. 옷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은 스스로 취향대로 재료를 골라 식빵에 펴 바른다. 가만 보면 무언가를 어딘가에 펴 바른다는 행위가 생각보다는 정교한 작업이다. 아이들이 처음으로 식빵에 스스로 잼을 발랐을 때 양말을 나의 도움 없이 혼자 신은 아이를 처음 봤을 때만큼 놀랐던 기억이 있다. 아이들이 비몽사몽 아침을 먹고 있을 때 양말 안 신은 아이가 있으면 양말을 챙겨주고 윗옷을 앞뒤로 거꾸로 입은 아이가 있으면 (신기하게 꼭 있다) 거꾸로 입었다는 이야기를 해준다. 그래도 아직은 부모의 도움이 필요하다. 양치를 마치고 아이들이 우르르 썰물처럼 집을 나선다.

아내가 출근을 한다. 거의 10년 만이다. 둘 중 하나는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을 그만두지 못할 것 같다는 나의 말에 아내는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이 선택으로  밖에서 일을 계속하고 싶었던 사람은 집에 갇혔고 집이 더 편했던 사람은 밖으로 내몰렸다. 그렇게 10년 가까이를 살았고 드디어 얼마 전 역전이 되었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집에 나 혼자 남겨졌다. 강풀 작가는 작업실에 들어가면 고양이가 바닥에 토를 했던지 똥을 쌌던지 일단 곧바로 책상 앞에 앉아 작업을 시작한다고 한다. 일단 시작을 해야 중간에 딴짓을 해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영상 링크). 잠깐만 쉬자고 소파에 앉았다가 순식간에 오전이 삭제되어 버리는 걸 몇 번 경험했기에 그 말에 무척 공감했다. 안타깝게도 나의 작업은 책상에 앉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똥을 치우는 것이긴 하지만 (나만 고양이 없어 ㅠㅠ). 

만만한 설거지부터 손을 댄다. 아이들이 남긴 토스트 조각을 입에 밀어 넣는다. 어제 밤에 식기세척기를 돌려놓은 나의 부지런함에 잠시 셀프 감탄하며 마른 그릇들을 서랍장에 올려놓는다. 싱크대의 그릇들은 뜨거운 물에 대충 닦아 빈 식기세척기에 다시 차곡차곡 쌓는다. 식탁 위에 잼 흘린 자국이 없는 운 좋은 날이면 행주질은 패스하고 토스트 부스러기를 손날로 쓱쓱 쓸어 다른 손에 모아 버린다. 세탁물이 많으면 세탁기를 돌리고 분리수거는 일주일에 한 번 몰아서 버린다. 구석구석 청소기를 돌린다. 마룻바닥에 얼룩이 많은 날은 청소기 헤드를 빼고 물걸레 헤드로 바꾼다. 애초에 청소기로 나온 물건이라 걸레질은 영 시원찮다. 온라인 장바구니에 담아 둔 지 꽤 된 스팀걸레청소기의 주문하기 버튼 앞에서 망설인다. 빨래가 다 됐으면 섬유유연제 시트를 넣고 건조 코스를 돌린다. 거실 화장실로 간다. 변기 뚜껑을 열어 변기와 그 주변에 물을 대충 뿌린다 (나만 다 아들이야 ㅠㅠ). 가끔 여유가 있는 날에는 청소기와 건조기를 분해해서 필터에 낀 먼지를 청소하고 변기에 세제를 넣고 솔로 청소한다.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난 10년을 어떻게 살았는지 서로가 서로를 충분히 보았으니까. 아내가 다시 출근을 하게 되어 기쁘고 응원하는 마음 한편에 아내도 이제 과거의 나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겠다는 기대가 생겼다. 빨리 집에 가서 육아를 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늘 쫓겼다. 사무실 퇴근 인사가 “회사일로 야근하는 게 소원이네요. 집으로 출근하겠습니다” 였다. 그때만 해도 집은 휴식이 아니라 전투의 공간이었다. 밖에 있는 사람은 마지못해 일하고 있었지만, 안에 있는 사람이 보기엔 그게 도피처나 해방구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죄책감이 들고는 했다. 아직 아이들이 식빵에 잼을 스스로 바르지 못할 때였다.

슬슬 출출해진다. 시계를 보면 어김없이 11시가 조금 넘었다. 잠깐 고민한다. 간단하게 (라면을) 먹으면 저녁을 따로 다시 준비해야 한다. 그래, 기왕이면 음식을 많이 해서 내 점심으로도 먹고 아이들과의 저녁으로도 먹자. 가끔 아이들이 “아, 아빠 우리 점심에도 급식으로 카레 먹었는데”라고 볼멘소리를 할 때 조금 난처하긴 하지만 글쎄, 그것참 신기하네. 나도 점심에도 카레를 먹었네?

건조기에서 꺼낸 옷들을 거의 다 개키다 보면 아이들이 하나둘 밀물처럼 집으로 돌아온다. 애매하면 학교에서 쉬를 좀 하고 오지. 얼마나 참았으면 가방을 내던지고 바로 화장실로 뛰어들어가서 시원하게 일을 본다 (아.. 변기 ㅠㅠ). 잠시 숨을 돌린다. 나의 엉덩이에 아이들의 배와 연결된 센서가 달린 모양이다. 엑셀의 IF함수처럼 “아빠가 엉덩이를 XX분 이상 어딘가에 붙이고 있다”는 조건이 ‘참’이면 “배고파”가 결과 값으로 나온달까. 저녁을 차릴 시간이다. 밥그릇 4개와 국그릇 4개 그리고 수저 4쌍. 반찬 그릇, 물통, 물컵을 식탁으로 나르면서 장바구니의 스팀걸레청소기 옆에 나란히 넣어둔 트롤리도 언젠가 꼭 주문하고 말겠다는 결심을 한다. 다행히 아이들은 크게 가리는 음식 없이 잘 먹는다. 다 먹은 그릇들을 싱크대에 두는 건 아이들 몫이다.

하루의 반을 혼자 있었음에도 제발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현관 도어락 소리가 들린다. 현관문이 열리면서 켜진 센서등이 구원의 빛처럼 찬란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수고했어”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종일 얼마나 긴장했을까. 얼마나 많은 일에 치였을까. 얼마나 지친 상태일까. 뻔히 알겠는데도 “고생했어 좀 쉬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어서 나는 잘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게 잘 안된다. 오히려 이제는 내가 수고했다는 말을 듣고 싶고 내가 쉬고 싶다는 생각이 앞선다. 육아휴직을 하고 집에 있기 전까지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다. 역할이 바뀌면 막연히 역전이 일어날 줄 알았다.

아이를 키우면서 맞벌이를 하는 지인이 자기는 요새 퇴근길에 심란해진다고 한다. 아이는 어느 정도 커서 손이 많이 가지는 않지만 밀려 있는 집안일을 생각하면 아찔하단다. 퇴근이라는 말은 언제나 설레는 말이었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걱정이 됐다. 육아휴직이 다 끝나면 복직을 할 수 있을까? 아니, 복직을 하는 게 맞는 걸까? 우리 가족은 어떤 조건에서 이 균형이 유지가 될 수 있을까? 집에 있고 싶은 사람은 집에 있고 밖에 나가 일하고 싶은 사람이 밖에 있는 지금이 오히려 모두가 안정적이지 않은가. 이미 역전은 평화롭게 이루어진건가. 앞으로 몇 번의 역전이 있을 것인가.

다음 주 메뉴는 냉동고에 쟁여둔 갈비탕과 함박스테이크와 불고기 정도가 될 것 같다. 이번 주에 김치찌개 찬스를 벌써 써버린 게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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