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나야, 기다림

기다림의 숨은 고수

2024. 11. 3.

🪐 #110 나야,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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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hers’ Note

안녕하세요, 님. 최근에 뭔가를 기다린 적이 있었나요?

기다림의 대상은 대중교통이나 택시일 수도, 약속 시간에 늦은 상대일 수도, 며칠 전 주문한 택배일 수도 있겠죠. (저희 레터도 기다림의 대상 중 하나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보다 '기다림'에 익숙한 존재가 우리 가까이에 있다고 하네요. 레터를 읽으시면서 답을 찾아보시죠. 이번 편지는 이현이 아빠 규성 님이 보냅니다.

+ 참, 썬데이 파더스 클럽이 운영 중인 오픈채팅방(육아 백과사전)에 아직 안 들어오셨다면 편하신 때 들러주세요. 다양한 육아 이야기가 오가고 있답니다.

1.
“아빠, 언제 출발해?

항공기 승무원들의 기내 안전 수칙 브리핑이 끝나고 5분 정도가 지났을까. 항상 타자마자 출발하는 교통수단들만 타오던 아이는 날지 않는 비행기 안에서의 기다림이 어색한지 질문을 시작했다. ‘금방 출발할 거야, 원래 비행기는 그래’ 라는 나름의 ‘답’을 했지만, 아이에게는 그저 ‘변’처럼 들렸는지 거의 몇 분 간격으로 같은 질문이 반복되었다. “아빠, 왜 출발 안 해?”

10월의 첫째 날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되자마자 야심 차게 결정했던 아이와의 첫 해외여행은 시작부터 괴로웠다. 연착이 확실했던 비행기는 거의 한 시간 가까이 활주로를 맴돌았고, 새벽같이 일어나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는 아이와 탑승객들의 긴장감도 비행기 안에서 같이 맴돌았다. 만약 미국이나 유럽에 갈 때 타는 큰 비행기였거나 대형 항공사의 좋은 좌석을 예약했다면 긴장감을 완화해 줄 터치스크린이라도 있었겠지만, 우리가 선택한 항공편의 가격에는 영화를 볼 스크린도, 물 한 잔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이륙을 하자마자 잠이 든 아이는 목적지에 도착할 무렵 다시 잠에서 깨어 질문을 시작했다.

“아빠, 언제 도착해?”

제주도보다 “겨우” 1시간 정도 더 가면 되는, 부모에겐 “객관적으로” “매우” 가까운 외국이었으나 네 살 아이에게 그런 부모의 거리 감각을 이해시키기란 쉽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가 원하는 대답(정말로 1분밖에 안 남았다는 대답)을 섣불리 하지 않고 비행기 바퀴가 땅바닥에 닿을 때까지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것이 어른으로서 해줄 수 있는 최선 같았다.

“다 와 가, 곧 도착할 거야.”

기다림은 여행 내내 잊을만하면 찾아왔다.
짝꿍인 지루함과, 이웃사촌 거짓말과 함께.

“기다려, (기차) 금방 올 거야.” (금방 안 옴)
“기다려, (쇼핑) 금방 끝나.” (안 끝남)
“기다려, (식당) 금방 들어갈 거야.” (대기줄 그대로임)

매일 아침 아빠 차 또는 택시를 타느라 기다려 본 적 없는 대중교통을, 상품권이 생기지 않는 한 웬만해선 하지 않는 아빠·엄마의 아울렛 쇼핑을, 가깝고 편리한 동네 식당만을 가느라 기다려 본 적 없는 맛집의 긴 줄을, 아이는 기다려야만 했다.

30년 이상의 인생을 겪어본 어른으로서는 당연하게 느껴지는 기다림들이 4년의 인생을 살아본 아이에겐 아직 낯설었던 걸까. 생소한 기다림에 아이는 끊임없이 기다려야 하는 이유를 찾았고 나와 아내는 새삼 세상에 이유 없이 기다려야 하는 것들이 참으로 많음을 느꼈다. 서로의 인내심이 바닥나는 순간이 되면 가족 구성원 세 명이 24시간 내내 붙어있는 게 매우 오랜만이란 걸, 평소 어린이집이 가정 평화에 매우 큰 기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4박 5일의 여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아이에게 그동안 협소한 사회 경험을 제공했다는 반성과, 기다리지 못하는 아이의 미래에 대한 걱정과, 디지털 환경에 너무 일찍 노출시켰나란 후회 등을 두 양육자 마음에 남기고서.

2.
“아빠, 왜 안 틀어줘?”

어느 평일 아침 8시, 어린이집을 향하는 자동차 안에서 아빠를 마치 AI 비서처럼 대하며, 자신이 말한 노래를 빨리 틀어달라는 참을성 없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순간 ‘버럭이’가 마음속 운전대를 잡았다.

“기다려, 아빠 운전하고 있는 거 안 보여?”

빨간불이 들어온 신호등 앞에 멈춰 서자마자 휴대폰을 들고 뒷좌석 VIP의 요청사항인 넘버블록스 노래를 검색해 재생을 눌렀다. 작년까지 음성인식이 지원되는 자동차를 탔었기에 즉각적인 재생을 기대하는 것이 이해가 가면서도 한편으론 지난 해외여행에서 싹튼 내 아이의 성격과 인내심에 대한 걱정들이 되살아났다.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이의 급한 성격을 개선하고 느긋한 아이로 키울 수 있을까… 란 생각들에 잠겨 있다가 아이의 덥다는 한마디에 바로 에어컨을 트는 내 모습을 보며 비단 아이만의 문제는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7시, 회사 일을 마치고 퇴근하려는 순간 휴대폰 대기화면에 어린이집 출석부 앱의 푸시 알림이 떴다.

[맘파파 알림] “심이현 원아가 하원하였습니다.”

평소보다 삼십 분 정도 늦은 알림을 보며 아내의 회사 일이 많았다는 추측을 했고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약 1시간 뒤, 집까지 잘 도착한 아내와 아이의 모습을 보고 나 또한 무사 귀가 보고를 한 뒤, 아이의 저녁 양치와 재우기를 돕기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방의 불을 끄고 침대에 나란히 누운 순간, 평소 같으면 아이의 빠른 취침을 위해 아무 말 없이 자는 척을 했겠지만 내심 아침에 차 안에서 짜증을 냈던 게 마음에 걸려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이현아, 기다림이 뭐라고 생각해?”

차마 미안하다는 말부터는 못 하고 그래도 때론 참고 기다리는 게 필요하다는 한마디의 교훈적 잔소리가 하고 싶어서 꺼낸 아빠의 불순한 질문이었는데, 이현이의 입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이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이후로 기다림과 인내심에 대한 나의 모든 고민과 잡념이 사라졌다.

“응, 어린이집에서 엄마 아빠 오는 걸 기다리는 거. (…) 난 항상 아빠 엄마를 기다려.”

3.
기다림에 대한 고민에 처음 빠졌을 때 나는 내 아이를 일종의 과제이자 풀어야 할 문제로만 바라봤다. 인내심이 부족한 문제. 성격이 급한 문제. 묵묵히 기다리지 못하고 무언가를 감수해 내거나 만족을 지연시키지 못하는 문제. 아날로그의 가치를 모르는 문제. 이유 없는 기다림에 자꾸 이유를 찾는 문제. 결국, 부모가 올바르게 가르치고 잘못된 습관을 바꿔야만 하는 과제.

하지만 돌이켜보니 내 아이는 누군가의 과제도, 풀어야 할 문제도 아니었다. 그저 평일엔 매일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아빠 엄마를 기다리고, 주말이나 휴일엔 아빠 엄마와 재밌게 노는 시간을 기다리는 지극히 평범한 네 살 어린이였다.

만 2세가 되고부터 어린이집에 다니며 매일 조금씩 재원 시간을 늘려온 아이는 첫 입학 6개월 동안 내내 울면서 등원했다. 반면 하원을 정해진 시간보다 앞당겨한 적은 거의 없었다. 바꿔 말하면 아빠나 엄마를 성실하게 기다릴 줄 아는, 컨디션이 조금 안 좋아도, 기침과 콧물이 나도, 때론 열이 올라도, 별다른 불평불만 없이 하원시간을 기다릴 줄 아는 능력자였다. (그런 인내와 기다림의 전문가에게 아무 생각 없이 ‘기다려’라는 말을 툭툭 내뱉은 나는 나가 죽어야 한다) 어른도 출근만 하면 집에 가고 싶은데, 5년도 채 살지 않은 아이가 나인투식스(9 to 6)를 3년째 해오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아이가 크면 클수록, 부모의 역할이 양육자가 아닌 목격자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양육자의 머리로 아이를 바라보면 영영 끝나지 않는 숙제이자 매일매일 풀어야 할 문제처럼 보인다. 목격자의 마음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엔 부모 자식 관계가 아닌, 각자의 삶을 스스로 풀어나가는 두 주인공의 관계처럼 느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의 삶을 내가 대신 풀어나가야 한다면 어떨까. 의사결정자이자 책임 관리자로서 ‘기다려’, ‘하지 마’ 와 같은 개입이 중간중간 필요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신 풀어나갈 수도 없고 내가 살아왔던 세상과는 매우 다른 세상을 살아갈 것이라면, 처음부터 주인공 스스로 실수하고, 스스로 풀어나갈 수 있게 최소한으로 개입하고 꼭 필요한 것만 지원해 주는 게 이상적인 육아의 태도이지 않을까. 오히려 기다리는 능력이 더 필요한 대상은 아이가 아닌 아빠와 엄마일지도 모른다.

다음 여행에서 아이가 기다림을 힘들어하거나 지루해한다면 무작정 관리자의 태도로 임하지 말고 목격자이자 관찰자로서 조금 더 살펴보고 싶다. 가능하다면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가득 찬 아빠 대신 인생 친구의 마음으로 내 친구가 하는 이야기에 공감해 주고 내가 아는 시간을 더 재밌게, 슬기롭게 보내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다.

그러다 보면, 아이 앞에 기다림이 ‘나야, 기다림’ 하고 찾아와도, 불청객이 아니라 몇 번 만나 본 친구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시간은 객관적이지만 기억은 주관적이니까.

규성@greg__pl

6개월의 육아휴직 경험을 밑천 삼아 일도 잘하고 육아도 잘하는 아빠로 인정받고 싶은 남자. 지속가능성과 무사안일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지만 미루기와 벼락치기가 특기이며 저녁형을 넘어 자정형 인간의 삶을 살고 있다. 결혼과 육아, 커리어와 물질적 안정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면서 J와 P를 오가는 자아를 갖고 산다. 책 <썬데이 파더스 클럽>을 썼다.

Fathers’ Update

지난 레터(109화 학군지가 뭐라고)에 보내주신 답장을 소개할게요. 고맙습니다.

💬 학군지... 3살 딸아이를 키우는 저에게는 머나먼 얘기일거라 생각했는데, 학구열이 평균 이상인 동네에 살다보니 벌써부터 학군 얘기가 나오네요. (요새는 초등학교도 학군을 따진대요 ㅎㅎ)

봄에는 개구리 알 잡고, 겨울에는 얼음 썰매 타던 동네에서 자란 저에게는 넘나 낯선 얘기들인데 저도 모르게 어느 초등학교를 가야 면학 분위기 좋은 중학교에 갈 수 있는지를 알아보고 있네요.

무엇이 올바른 교육일까요 ㅠㅠ (기무겨무)

💬 직업군인이었던 아빠를 따라 이사를 자주 다녔던 저는 학군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어요. (정착이 아닌, 부모님과 함께하며 가정내에서 바름 인성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저희 부모님 뜻을 알았기에) 아이를 낳고 육아하고 있는 지금… 저와 남편도 공부보다는 그저 건강하게, 부모와 함께 인생을 배워가자는 마음을 갖고 육아하고 있답니다! (어떻게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