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안녕하세요. 님,

이번 편지는 육아휴직 중인 정우님이 보냅니다. 아이들 하교를 기다리면서 정우님은 'ㄷㅁㅇㅇㄱ'을 떠올렸다고 하는데요. 과연 정우님 머릿 속에 떠오른 건 뭐였을까요? 지금 바로 확인해 보세요.

어수선하다. 어디 서 있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북적인다. 도복인지 운동복인지 모를 옷을 입고 있는 한두 명의 남자들과 할머니들 몇 명을 빼곤 전부 엄마들이다. 그 무리의 주위를 노란 버스들이 둘러싸고 있다. 아는 사람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뚫어지게 한곳을 바라보고 있다. 나 역시 머리로는 옆 사람에게 인사를 시도하지만 역시 입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정황상 이들과 스몰토크는커녕 눈인사를 하게 될 사이로 발전할 가능성도 현저히 낮다고 생각하며 열리지 않는 입을 정당화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응시하고 있는 지점에서 드디어 아이들이 보인다. 하교 시간이다.

멀리서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 아이들의 수가 점점 많아진다. 짧지도 그렇다고 멀지도 않은 교문까지의 거리. 아이들이 가까워지자 기시감이 든다. 어? 지금 이 장면 분명히 어디서 봤는데? 맞다. 퀴즈 탐험 신비의 세계 오프닝 장면에서 본 세렝게티의 누 떼가 틀림없다. 학교라는 포식자를 뒤로하고 달려 나오는 초식동물들. 이유도 모른 채 오늘도 악어가 득실거리는 강을 건너야만 했던 순수한 생명체들. '아프리카 초원소'라고도 불리는 누의 어깨 높이가 1.2~1.5미터라고 하니 키가 여느 초등학생과 비슷하겠다. 성공적으로 학교에서 하루라는 강을 건넌 아이들의 얼굴에는 해방감이 잔뜩 묻어있다. 

몇몇 누 아니 아이들은 반대편 강둑에 도착하자마자 어른의 품에 몸을 던지기도 하고 몇몇 아이들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노란 학원 버스에 들어가기도 한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삼삼오오 주택단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정문 앞의 인파는 순식간에 줄어든다. 점점 초조해진다. 우리 아이는 언제 나오지? 길이 엇갈려 혼자 집에 갔나? 무슨 일이 있나? 오늘 학교 갈 때 어떤 옷을 입었더라? 생각이 많아질 무렵 멀리서 아이들이 보인다. 손을 번쩍 들어 아빠가 여기 있음을 알린다. 아이를 만나게 되어 반가운 마음뿐만 아니라 이른 오후에 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가 슬리퍼 질질 끌고 학교 앞에서 아무 이유 없이 서성거린 게 아니라는 표시를 주위 사람들에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저도 먹이사슬에서 여러분과 같은 위치랍니다.' (물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아이들의 표정을 살핀다. 가끔 시무룩한 날도 있지만 다행히 기분 좋은 얼굴일 때가 많다. 이날은 특히 기분이 좋아 보인다.

"오늘 무엇이 널 웃게 만들었어?"

"네가 몰랐던 것 중에 오늘 새롭게 알게 된 게 있어?"

"오늘 네가 했던 것 중에 정말 어려웠던 게 있어?"

마음만은 방금 직역한 듯한 이런 따끈따끈한 질문들을 하고 싶지만 역시나 늘 단순한 질문들이다.

"오늘 어땠어? 재밌었어?"

"와, 재밌었겠다"

"점심 급식에 뭐 나왔어?"

"와, 맛있었겠다"

이사 와서 2학기부터 다니게 된 새 학교라 아직은 아이들과 등하교를 함께 하고 있다. 등교는 출근하는 엄마와 하고 하교는 집에 있는 아빠와 한다. 전에 다니던 학교도 개학하고 한 달 정도 지나서 부모 없이 등하교 하는 연습을 했고 금방 저희들끼리 잘 다녔다. 이제 곧 혼자 오가는 연습을 하게 될 것이고 금방 저희들끼리 아빠가 기다리고 있는 집에 올 것이다.

학교와 집 중간쯤에 횡단보도가 하나 있다. 양쪽에는 교통을 통제하면서 아이들의 보행을 도와주는 안전도우미 어르신들이 있다. 전에 살던 동네에선 학부모들이 했던 것 같은데 아니었나? 등교 시간에만 학부모들이 하고 하교 시간엔 어르신들이 하셨었나? 생각해 보다가 문득 억울해진다. 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깃발을 들고 있는 학부모들이 엄마 아빠 또래로 보이다가 언제부터 형 누나 또래로 보이더니 드디어 나와 같은 또래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믿어지질 않았다. 내가 내 또래의 학부모들과 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깃발을 들고 서 있는 날이 왔구나. 이제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그들이 나의 동생 또래, 많이 더 지나면 아들딸 또래로 보일 때가 올 텐데 느닷없이 다시 엄마 아빠 또래라니!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프로그램이 종영한지 벌써 20년이 됐다는 것만큼이나 괜히 뭔가 불공평한 느낌이었다. 

집에 도착했다. 아이들은 가방을 집어던지면서 소리를 질렀다.

"아빠, 앞으로 9일 동안 잘 부탁해!"

바야흐로 2024년 9월 13일 금요일이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추석 연휴이고 목요일과 금요일은 아이들 학교 재량휴업일이었다. 이럴 때만 날짜 계산 잘 하는 아이들과 안타깝게도 함께 기뻐하지는 못했다. 나는 그만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비틀거리며 노란 유치원 버스에서 내릴 막내 아이를 데리러 다시 집 밖으로 나갔다. 

Fathers’ Update

지난 레터(107화 이놈 아저씨와 밤할머니)에 보내주신 답장을 소개할게요. 고맙습니다.

💬 하원길에 매일 룸미러로 아이의 표정을 살피며 그날 하루를 어떻게 보냈을지 짐작하고는 합니다. 이번에 새로 바뀐 로고가 그런 저의 모습을 누군가 바라보고 그려주었다는 생각도 들어, 애틋한 기분입니다. (볼봉이아빠)

💬 막 17개월이 된 딸을 양육하고 있어요. 저저번달에 방문한 괌에서 현지 페인팅에 있는 와일드(?)한 모습에 상의를 탈의하고 긴머리를 휘날리는 괌 남자분들 그림을 보고 딸이 놀라길래 "안자면 괌 아저씨 온대"를 몇번 시전했다 효과적으로 먹히는 것을 보고 더 써먹으려던 찰나 친정어머니한테 공포심 유발한다고 혼나서 더이상 안 쓰고 있었네요. 아직 아기가 말이 잘 통하는 단계는 아니라 "외국 가셨대"는 못했지만 ㅎㅎ 더이상 언급하지 않고 있으면서도 너무 말을 안 들을 땐 입에서 나오랑 말랑 하는 그 이름 괌아저씨.. 오늘 레터를 보며 너무 공감하며 쿡쿡 웃었답니다. (재클린엄마)

💬 어렸을때부터 들어본 “이놈 아저씨~”단어에 반가웠다가 레터를 읽어내려가면서 아차! 싶었어요. 우리 세대때의 (라떼는~) 부모님은 “이놈 아저씨”가 심리적으로 아동학대하는 것을 모르셨으니까요 :) 제게는 이놈 아저씨를 부르며 육아하셨던 부모님이 손주에게는 이놈아저씨를 부르기는 커녕… 밤잠을 안자고 싶어해도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모습이 사랑스럽다“고 다 들어주는 조부모님으로 성장하셨답니다. (요놈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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