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4.2%. 2022년 3월, 육아휴직을 앞두고 처음 마이너스통장(이하 마통)*을 만들었을 때의 금리다. 1년 뒤 만기를 연장했고 금리는 6% 초반으로 올랐다. 2023년 4월, 복직과 동시에 부지런히 대출을 갚기 시작했지만, 통장의 마이너스 숫자는 기대만큼 빠르게 줄지 않았다. 대출금리는 어느새 6.24%까지 올랐다.

* 한도 대출 상품 중 하나. 마이너스 출금 가능 한도를 부여하는 대출로, 잔고가 없어도 부여된 한도 내에서 자유로운 입출금이 가능하고, 쓴 만큼 이자가 발생한다.

‘육아하려고 휴직한 거니 잠시 경제활동을 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생각했다. (먼저 육아휴직을 쓴 아내는 복직 대신 창업에 도전했다. 가구의 경제활동 관점에서는 맞벌이의 정반대 상황이었다.) 한편 금융앱을 열 때마다 적지 않은 숫자가 마이너스로 표기된 걸 보는 일은 은은한 스트레스였다. 심지어 마통은 대출이자 또한 자동으로 대출하여 갚는다. 잠깐 방심하면 대출원금이 복리로 불어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국은행은 지난 1년 동안 기준금리(현재 3.50%)를 한 번도 올리지 않았다. 미 연준은 2년에 걸쳐 금리를 0.25%에서 5.50%까지 인상했다. 한국 경제의 기초 체력과 대내외 여건이 아무리 미국 경제와 다르다고 해도, 이제는 우리나라 기준금리도 미국처럼 오를 확률이 높아 보였다.

며칠 전 마통을 해지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기존보다 1.29%p 더 낮은 금리의 신용대출로 바꿨다. 금리는 4.95%. 대출금리가 더 오르기 전에 원금과 이자를 모두 갚아 해지하고 싶었지만, 복직 후 8개월이 지나면서 생각을 바꿨다. 주택담보대출까지 있는 상황에서 단기간에 마통을 모두 갚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는 2024년 12월까지 새로운 대출을 갚는 트랙으로 다시 뛰어야 한다.

회사 프로젝트 중에는 임원의 일과 삶, 리더십에 대한 생각을 인터뷰로 풀어내는 시리즈가 있다. 섭외를 위해 미리 만난 어느 임원에게 물었다. “주말에는 푹 쉬나요?” 그에게도 자녀가 있다. 업무 강도와 성취에 대한 기준이 유독 높은 이 회사에서 어떻게 일과 가정을 동시에 꾸리는지 궁금했다. 임원이 웃으며 답했다. “예전엔 주말에도 일했지만 이제는 안 해요. 중요한 메시지가 와도 급한 건이 아니면 월요일 아침에 답하고요. 주말에는 회사를 끊습니다.” 그의 당당한 답변을 들으며 내심 안도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농담 섞인 말에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대신 주중에는 가족을 과감히 끊습니다.”

다른 남성 임원도 사석에서 비슷한 말을 했다. “아이가 신생아 때부터 이곳에서 일을 시작한 터라 아내가 거의 다 키웠죠. 그 부분은 많이 아쉬워요.”, “주말에라도 아이와 온전히 시간을 보내려고 해요.” 여성 임원 중에 아직까지 자녀를 키우는 분은 없었다. 자녀 계획이 있긴 하지만, 현재 딩크로 살고 있거나 싱글이거나.

타인의 삶을 함부로 판단할 순 없다. 실제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이들이 성실히, 꾸준히 노력해 온 과정을 듣다 보면 나 역시 동경하는 마음이 절로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일에 몰입해 치열하게 살면서 성과를 만들어냈으니, 지금의 임원 포지션까지 다다른 게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누군가의 생각과 말을 취재하여 그걸 이야기로 포장해 전달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으로서 요즘 나는 이런 고민을 한다. 세상은, 특히 한국 사회는 왜 치열한 삶, 일과 자기 계발 이야기만 주로 팔릴까. 아니면 재테크나 부동산 이야기이거나. 회사원 중에도 임원 비율은 1% 남짓일 텐데, 왜 이들의 이야기에만 콘텐츠를 기획하는 이들이 주목할까. 이들의 인사이트는 누굴 위한 걸까.

완벽한 사람은 없듯이, 완벽한 임원이나 팀장, 팀원도 없다. 이는 돌봄과 양육도 마찬가지다. 완벽한 엄마, 완벽한 아빠따윈 없다. 그런데 미디어나 SNS에서는 완벽함에 대한 이미지가 유령처럼 떠돈다. 내 아이의 재능이 발현되는 순간, 내 아이 방 가꾸기 팁, 훈육할 때 주의사항, 내 아이에게 꼭 맞는 유치원 고르기 등 온갖 육아 콘텐츠가 전문가의 말을 빌어 인용되고 ‘좋아요’와 ‘공유’를 통해 확산된다.

(…) 산다는 일은 끊임없이 어딘가를 더럽히고 쓰레기를 만드는 일이기도 한데 아이가 있다면 말할 것도 없고 나만 어지럽고 뒤처지고 부족한 엄마 같다. 하지만 우린 모두 잘 알고 있다. 정작 진짜 우리네 삶은 편집되고 잘려 나간 정사각형 밖에 있다는 걸. 나도 셀카부터 아이 사진까지 올릴 사진은 제일 정갈하고 잘 나오고 번듯한 걸로 고른다. 진짜 생계와 살림은 100장 중 골라낸 두세 장이 아니라 휴지통으로 이동한 97, 98장에 담겨 있다. 그러니 SNS에 넘쳐나는 쇼룸과 각종 엄마표를 기준 삼지 말자.
— 임희정, 《질문이 될 시간》(수오서재), p.235

이제는 일만 잘하는 것 말고, 다양한 삶의 풍경을 보고 싶다. 누군가 돌보는 사람, 끝도 없는 집안일을 어떻게든 해내는 사람에 대한 서사도 많아지길 바란다. 돌이켜보면 내가 육아휴직을 쓰고 복직하여 적응하는 동안 도움이 된 건 오히려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들이었다. “실은 저희도 마통 썼어요.”, “갚는 데 시간이 꽤 걸리죠? 조금만 힘내세요. 곧 갚을 거예요.” 등등.

모든 걸 잘 해내야 한다는 허상을 좇아온 스스로를 이제는 반성한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더 무서운 대출 상품에 가입되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 대출은 남과의 비교를 통해 내 인생의 소중한 시간과 관심, 에너지를 야금야금 잡아먹고 있다. 내가 나를 믿지 않으면 누가 나를 믿을까. 마찬가지로 내가 돌보는 대상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것도 중요하다.

복직 후 일터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은 한 해였다. 대출 상환 계획을 세워 차근차근 갚아 나가고,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해 일상의 모든 균형을 재배치하기. 이게 2023년 동안 내가 주로 해온 일인 것 같다. 창업 2년 차인 아내와의 대화에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새해에는 아내와의 관계에도 신경 쓰고 싶다.

요 며칠은 33개월 차에 접어든 송이를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찾느라 이곳저곳을 알아봤다. “나보다 훨씬 큰 곰인형! 갈색!” 송이가 원하는 게 뚜렷하다 보니 그걸 찾는 게 쉬우면서도 어려웠다. 다행히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은 갈색 곰인형을 발견했고 예약 주문을 넣었다. 금리를 낮춰 대출이자를 줄이는 데 성공했지만, 그만큼 곰인형을 사는 데 돈을 썼다. 때로는 이런 숫자 사이에 내 인생의 진짜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게 아닌가 싶다.

Fathers’ Note

💬 유학 중에 제가 느꼈던 마음이 아이와는 다르겠지만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어 남겨요! 부모로서 걱정되고 힘드실테지만,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든든한 숲 같은 마음이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저 또한 동일한 전공으로 유학을 떠났음에도 수업을 전혀 못알아들을 때의 좌절감이 컸어요. 결국 부모님이랑 통화하다 엉엉 울었는데 엄마도 가만히 듣고 계시다가 최선을 다 해보고 안되면 한국으로 와. 라고 해주셨던 기억이 나요! 그 시기만 지나면 되요. 아이는 클 테고 그 시기가 지나면 단단하게 만들어 줄거에요! (킴하)

💬 제가 미국에서 보낸 첫 1년이 떠올라 유독 인상적이고 먹먹했던 편지였습니다. 첫째가 (아마도 혼자 견딜 수 있을 만큼 견디다) 어머니께 털어놓은 낯선 환경에서의 힘듦이 고스란히 전해지더라구요. 저도 그랬어요. 한국에서는 그저 밝고, 친구도 많고, 뭐든 칭찬도 곧잘 받았는데 (그리고 내가 영어도 제일 잘 하는 것 같았는데!)... 미국에 와보니 말귀도 하나도 못 알아듣겠고, 괜히 겉돌게 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가슴이 너무 답답했거든요. 오늘 나는 정말 바보 같았는데, 설마 이것보다 더 바보 같은 날이 있을까? 생각하자마자 돌아온 내일은 “응~ 그건 바로 오늘.” 동생도 함께였던지라, 동생에게만은 모범이 되고 싶어 괜히 다 괜찮은 척 하면서도 그런 날들이 언제까지 계속 될지 가늠이 되지 않아 많이 막막하고 괴로워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정말로 어느새 그런 날들이 조금씩 나아지더라고요. 스스로 좀 내려놓기도 한 것 같지만, 언어도, 문화도, 겉돌고 있는 나 자신도 천천히 편안해졌어요.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미국에서의 첫 한해를 떠올리면 시커멓고 집채만한 두려움에 잡아먹힐 것만 같던 어린 제가 짠하지만 - 분명한건 그 폭풍우같던 시간 동안 제가 정말 많이 단단해졌다는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낯선 환경도 사람도 그때만큼 무섭지 않았고, 전학을 갔을 때도, 취업을 했을 때도 ‘처음은 다 어렵고 불편한게 당연한 거니까’ 생각하면서 여유롭게 적응해나가는 스킬이 빛을 발한 것 같아요. 정우님의 아드님들에게 지금의 시간은 어떻게 기억될까요? 분명 더 단단해지고, 깊어지고, 넓어지는 시간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세 아들의 적응을 위해 고군분투하시는 멋진 부모님과 함께 헤쳐나갈 하루하루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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