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1.

6일의 공휴일이 주어졌던 지난 추석, 연휴 이튿날 수원 처가댁을 방문한 나와 아내는 장모님의 은혜로 3박 4일의 육아 휴가를 누리게 되었다. 서운할 정도로 쿨하게 아빠, 엄마를 보내주는 아이 덕에 휴일 대낮 낯선 자유를 얻은 우리는 집으로 올라가는 도로상황이 만만치 않음을 확인하고 근처 영화관에서 시간을 때우다 올라가기로 했다. 영화관에 가는 것도 모처럼만이었지만 시간을 때우는 고민을 한다니, 그 자체가 호사였다. 

호사로운 오후를 완성할 영화를 고르는 과정에서 사소한 위기가 있었다. 40대의 나이에도 20대의 외모를 유지하며 얼굴이 표값을 정당화한다는 강동원의 영화가 예매율 1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영화를 본다는 건 사실 영화가 아닌 강동원을 보는 것이었기에 아내에겐 가장 자연스럽고 행복한 선택지였지만, 나에겐 아내에 대한 초월적인 사랑과 헌신을 기반으로 선택을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도무지 강동원을 이길 카드가 없는 나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최근에 라디오에서 추천받은 영화 제목을 아내에게 던졌다. '원스', '비긴 어게인'의 감독으로 유명한 '존 카니'가 연출하고 강동원과 같은 해에 태어난 '조셉 고든 레빗'이 나오는 <플로라 앤 썬>이라는 영화였다. 딱 봐도 예술영화 제목 같고 전체 예매 순위에서도 한참 뒤에 있는 영화의 현황을 살펴 본 아내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의외의 OK사인을 주었다. 조만간 내 생일이니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보자는 것이었다.  

영화는 내 기대와 다르게 흘러갔다. 한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화면 속에선 기대했던 ‘비긴 어게인' 같은 감성적인 음악영화의 모습 대신 여주인공의 거친 입담과 어두운 청소년기를 보내는 아이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나와 아내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강동원의 역할(스토리를 이기는 얼굴)을 조금이나마 해주길 바랬던 남주인공 조셉 고든 레빗은 세월의 풍파를 그대로 맞은 듯한 이마의 주름과 덥수룩한 수염을 하고 나와 희망 대신 절망을 안겨 주었다.

영화는 다행히 중반 이후 음악영화의 진가를 보여주며 해피엔딩으로 끝났고 아내도 좋은 평을 하며 나왔지만 내 머릿속엔 다른 잔상이 남았다. 10년 전 영화에서 봤던 젊고 푸릇푸릇한 모습이 사라지고 중년의 노화를 고스란히 보여준 남주인공의 얼굴, 그리고 그걸 정당화하듯 그가 부른 노랫말이었다.

"…where everything and nothing changes every single day."

"...매일 모든 것이 변하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지"

2.

3박 4일의 휴가는 영화 한 편처럼 짧았다. (한 편의 영화도 아닌 영화 예고편 같았다..) 평소 같으면 차들로 가득 차 있을 월요일 아침, 서울 시내 도로는 정오에도 새벽 두 세시의 모습처럼 한산했다. 추석 당일 수원에 내려갈 때와 달리 5일차 귀성길은 내비게이션의 도착 시간이 한결같이 유지되고 고속도로를 정말 고속으로 지날 수 있었다.

이 광경을 보면서 나는 귀성 타이밍을 잘 잡았다는 생각보다 긴 명절을 예전과 다르게 보내는 사람들의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가족과의 시간을 최소화하고 앞 뒤로 휴가를 붙여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들, 영화관에 가는 대신 밀린 시리즈를 집에서 OTT로 보는 사람들, 우리처럼 아이를 오랜만에 만난 가족에게 맡기고 그들만의 여가생활을 즐기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명절에도 쉬지 않고 평소처럼 일을 하는 사람들. 매년 추석은 변함없이 오지만 우리를 비롯해 추석을 보내는 사람들의 모습은 많이 변한 것 같았다. 

3.

고작 세 밤을 따로 자고 만났을 뿐인데 아이는 어딘가 달라 보였다. 목소리는 전보다 더 쩌렁쩌렁해졌고 살은 며칠 전보다 더 포동포동해진 듯 했다. 당연히 맞을거라고 생각해 보냈던 긴 바지는 이제 발목을 훤히 드러낼 정도로 작아져 있었고 과거 앳되다고만 생각했던 얼굴도 묘하게 어른스러워진 느낌이 들었다. 아빠와 엄마는 3일은 커녕 3년이 지나도 더이상 크지 않는데, 만 3살의 아이는 하루하루 참 쉽게 자라는 느낌이었다. 

어른의 모습은 물론이고 어른스런 모습도 상상 못하던 시절을 지나고 이제 제법 의사소통도 되고 혼자서 제앞가림도 하며 무섭게 크는 아이를 보면서 이전에 없던 걱정과 두려움이 생기곤 한다. 그 두려움은 참으로 쓸데없고 모순적인데 예를 들면 이런 생각들이다. 

• 역변 포비아 (aka. 못생김 포비아)
  - 어젯밤 같이 잔 아이의 얼굴이 다음날 갑자기 어른의 얼굴이 되면 어떡하지?
  - 지금의 속도로 자라다가 갑자기 성숙한 (귀여움과는 거리가 먼) 청소년이 되면 어떡하지?
  - 거의 매일 찍고 싶은 아이의 얼굴이 더 이상 찍고 싶지 않은 얼굴이 되면 어떡하지?
  
  

• 정변 포비아 (aka.사회화 포비아)
  - 아빠란 호칭을 시종 부르듯이 부르는 녀석이 갑자기 철이 들어 날 아버지라고 부르면 어떡하지?
  - 지금의 즐거움을 주는 튀는 행동들, 튀는 말들이 점점 정제되고 깎여져나가 더이상 특별하지 않게 느껴지면 어떡하지?
  -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고 안정적인 아이가 되어서 현재의 모습보다 과거의 모습을 더 그리워하게 되면 어떡하지? (한편으론 제발 그리워할 날이 빨리 왔으면 싶기도 하지만..)

언제쯤 허리를 세우고 똑바로 앉을지, 기저귀와 쪽쪽이는 언제 뗄지, 숫가락은 언제 안 떨어뜨리고 먹을지 고민하면서 아이의 변화를 간절히 원했던 시간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변하지 않는 걸 원하다니 배가 부른 걸까. 어른처럼 계단을 오르락 내리고, 집에서 혼자 팬티와 옷을 입고, 식당에서 조용히 본인의 밥그릇을 비우는 아이를 보다보면 시간이 조금 천천히 갔으면, 더 이상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든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걸까, 아니면 부모의 욕심이 끝이 없는 걸까. 아니면 그저 내 생각과 걱정이 너무 많은걸까.   

그 방향이 역변이든 정변이든 내 아이의 성장을 알아차리고 그 변화를 가까이서 체감하는 것은 그 어떤 뉴스보다 드라마틱하고 개기월식보다 보기 힘든 희소한 경험인 것 같다. 아이가 겪는 첫 경험, 아이가 보여주는 첫 모습, 첫 변화는 그 자체로 힘이 세서 세상 모든 뉴스를 시시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내 자신이 어릴 때 멋모르고 했던 성장의 비하인드를 내 아이를 통해 다시 천천히 바라보게 되면서 '아 이게 정말 오래 걸리는 일이었구나', '누군가의 기다림과 노력이 함께 있었던 일이구나'를 깨달을 때면 내 과거가 조금 다르게 다가오기도 한다. 

불과 몇 개월전까지만 해도 누군가 왜 아이를 낳아야 하는지 물어봤을 때 '안 낳아도 됩니다. 꼭 낳을 필요는 없어요. 신중하세요!!' 라는게 내 고정된 생각이었다면 지금은 다른 레퍼토리가 하나 생겼다. 지금의 인생을 바꿀 수는 없지만 아이를 통해 잊혀진 내 과거의 성장과 성취를 다시 느껴 볼 수는 있다고. 내가 언제 태어났는지, 언제 첫 걸음을 떼었는지 등의 객관적 사실은 바뀌지 않지만 주관적 해석은 달라질 수 있고 더 풍부해질 수 있다고. 현재와 과거를 함께 살아 볼 수 있다고.    

마지막으로 내 아이가 초중고를 거치며 설령 역변을 하더라도 주관적으론 항상 귀엽게 여기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내 부모님이 내 앞에서 오랜시간 빈틈없는 연기를 해주셨던 것처럼 말이다.

Fathers’ Update

💬 와 이렇게 정성스럽게 여행 꿀팁을 적어주시는게 쉽지 않은데! 감사합니다. 덕분에 갑자기 여행 뽐뿌 막 올라오는데 성탄절 전까지 연휴 없는거 실화인가요.. (밤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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