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1.

퇴근길 러시아워에 광화문 삼거리, 어린이집으로 가는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던 때였다. 길 안내 앱에 뜨는 도착 예상 시간은 저녁 6시 30분. 하루 전날 이현이 목욕을 시키며 샴푸질이 힘들어질 정도로 길어진 머리카락을 보고 키즈 미용실을 저녁 7시로 예약해둔 터였다. 불안한 마음에 어린이집을 경유지로 설정하고 미용실까지의 예상 시간을 검색했다. 경로 전체가 빨간색으로 물든 지도와 함께 앱이 알려준 도착시각은 예약시간으로부터 일 분 전. 초조함이 몰려왔다.

신호가 바뀌고 출발하려던 찰나, 차에서 알 수 없는 충격이 느껴졌다. 머리가 멍해질 틈도 없이 재빨리 정신을 부여잡고 거울로 뒤차를 살폈다. 나보다 어른처럼 느껴지는 운전자가 불안한 얼굴을 하고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고를 처음 겪은 것 같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이해관계를 따졌다면 허리라도 부여잡고 내렸겠지만 할 일 많은 양육자에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오로지 하원과 미용실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는 걱정뿐이었다. 

막상 눈으로 확인한 사고는 다행히 매우 가벼웠고 내 몸도 매우 멀쩡하게 느껴졌다. 상대방은 사고가 처음이라 잘 모르니 보험사가 현장에 올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했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고 그럴 시간도 없다고 얘기하고 사진 촬영과 연락처 교환만 마친 뒤 도망치듯이 길을 나섰다. 속으로 내가 피해자여서 다행이라고, 이미 책임질 게 많은 데 더 많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돼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린이집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은 6시 40분, 이현이를 태우고 미용실을 목적지로 찍어보니 예약 시간보다 20분이나 늦게 도착하는 것으로 나왔다. 내 머리였으면 유연하게 미루거나 취소를 했겠지만 예약한 키즈 미용실은 미루거나 취소할 경우 위약금이 발생하고 주말 예약도 어려운 곳이었기에 전화로 최대한 사정사정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전화를 받은 미용실 사장님은 처음에 퇴근이 늦어진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셨다. 하지만 내가 가벼웠던 교통사고를 중대한 사고였던 것처럼, 한 시간 전 일을 십분 전 일처럼 과장해 말해가며 동정심 유발 전략을 펼치니 아이가 얌전히 머리를 잘 자르느냐고 묻고는 빨리 와달라며 단념하듯이 시간 연장을 해주셨다. 

과거 미용실에서 울고불고했던 어린아이는 자동차와 영상 패드가 갖춰진 키즈미용실에서 십분만에 모범적으로 커트를 마쳤고, 집에 오는 길에 햄버거와 밀크셰이크까지 먹으며 행복하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사고 이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던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내에게 잠깐만이라는 말을 던진 채 바로 침대에 누웠다. 등을 대고 편안하게 누우니 하루의 모든 불편했던 순간들과 불필요했던 긴장들이 소멸하는 기분이었다. 하루에 대한 책임감, 양육자로서의 의무감도 함께 내려놓아 졌다. 그리고 그날 나는 다시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2.

다음날 출근길, 아침 아홉 시부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어제 접수한 자동차 보험 관계자의 전화였다. 출근길 한 시간 동안 내 전화기는 뜨겁게 울렸다.  

“안녕하세요 S화재 대물처리 담당자 입니다. 잠시 통화 가능하실까요?” 

“안녕하세요 S렌터카 서대문대리점입니다. 대차가 11시쯤부터 가능할 것 같은데 선생님 회사로 가면 될까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보상담당자입니다. 불편하신 곳은 없으신가요?” 

전화가 끝나자마자 카톡으로 사고접수번호와 진행되고 있는 절차가 안내되었다. 외관상 멀쩡해 보이는 내 차는 회사로 찾아온 대차 담당자에 의해 정비소로 입고되었고 모범택시에서나 쓸 법한 중대형 세단이 임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호텔 컨시어지 버금가는 응대와 로켓배송보다 빠른 사고 처리에 새삼 호사를 누리는 기분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보험료의 잉여가 얼마나 크길래 사고 한번에 보험 생태계 구성원들이 일사천리로 움직이며 피해자를 보살피나 싶었다. 

육아에도 이런 보험 생태계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양육자가 사고를 입었을 때 하원 등 각종 돌봄을 대신해줄 사람을 바로 구해주는 보험. 클라이언트의 피드백이 몰아쳐서 야근이 불가피한 날 아이의 저녁 시간을 책임져주는 보험. 아빠나 엄마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장이 났을 때 남겨진 양육자에게 보상을 해주면서 아픈 양육자를 바로 고쳐주는 보험. 보험료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보험이 있는데도 돈 때문에 가입을 못 한다면 슬퍼질 것 같아서.    

3.

이틀 연속 야근에 새벽 퇴근을 하고 충혈된 눈으로 일어난 어느 아침, 멀쩡하던 허리에서 뻐근함이 느껴졌다. 자동차는 뒤범퍼에 난 작은 자국 하나 없애려고 쾌속으로 정비에 들어갔지만, 운전자는 바쁜 현생을 핑계로 병원 근처에도 못간 상황이었다. 남편의 사고 이후에 병원 다녀왔다는 소리는 못 듣고 야근해야 된다는 소리만 들은 아내는 정확히 사고 8일 차쯤 되는 날 아침 내게 일침을 가했다. 

“왜 차보다 못한 삶을 살아?”

“이현이가 타고 있었어도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거야?”

둘 다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반박은커녕 감정이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차량에 이현이가 타고 있었다면 당일에 응급실이라도 달려가 엑스레이를 찍어봤을 나일 테니. 자동차보다 못한 삶이란 말이 오전 내내 머리를 맴돌던 그날, 팀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점심을 먹은 뒤 정형외과를 방문했다. 진료실에 앉자마자 의사 선생님께서 질문을 던지셨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4.

전쟁 같은 일주일을 되돌아보며 작년 아내출장과 장모님 찬스가 겹칠 때 혼자 본 프랑스 영화가 떠올랐다. 제목은 <풀타임>. 영화는 자신의 시간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두 아이의 싱글맘 쥘리가 극심한 프랑스의 교통 파업 속에서 자신의 직장과 아이들에게 약속한 시간에 지각*하지 않기 위해 분투하는 일상을 담고 있다. 

*영화 예고편의 홍보 문구가 ‘늦으면 안 돼!’ 일 정도로 영화는 시간과 싸우는 양육자의 하루하루를 근사한 현실 블록버스터로 보여준다. 

사실 이 영화가 떠오른 이유는 나의 감상보다 다른 사람의 블로그 리뷰를 읽고 받았던 충격 때문이다. 블로그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취미생활은 물론 친구를 만나 술 한잔이나 밥 한끼 먹을 시간도 없는 싱글맘이라니..영화 풀타임은 나같은 싱글족에게 더 결혼할 생각을 싹 지우게 해주는 작품이다.”

결혼한 당사자로서 평소에 결혼제도를 긍정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뭔가 의문의 1패를 당한 느낌이었다. 마치 지금 직장의 미혼 멤버들이 나 때문에 결혼할 생각이 없어졌다고 말하는 것처럼 감정이입이 되기도 했다. 같이 사는 사람도 때로 내 일상을 자동차보다 못하다 보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내 결혼과 육아 이후 삶은 어떻게 보였을까. 과연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양육자가 되면서 스스로 포기한 것들이 있다. 친구나 회사 사람들과의 일상적인 저녁 약속, 평일 저녁 테니스, 스트레스가 많은 날 보던 심야영화, 주말 낮 열두 시까지 잤던 늦잠 등등. 대부분 나 자신을 위한다고 했던 일들이자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지금은 저녁 약속을 갖거나 테니스를 하던 시간에 아이 목욕을 시키고, 심야영화를 보던 시간에는 회사에서 다 못 끝낸 장표 작업을 하고, 주말 아침이면 아이의 보호자가 되어 어딘가로 나간다. 나의 허리통증보다 아이가 모기에 물려 느끼는 가려움이 더 중요해졌고, 내 충혈된 눈보다 아이의 다크서클을 더 걱정하는 부모가 되었다. 나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생겼기에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닌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한 일이었지만 그만큼 결혼 전 가장 우선순위 높았던 나 자신이 이젠 가장 마지막 우선순위가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누군가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구속하면 안되듯이, 내가 기꺼이 감수하는 불편함이 누군가를 또 불편하게 만든다면 과연 그게 건강한 모습인지 고민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부모님 세대라면 요즘 부모들의 엄살이 매우 심하다는 소리를 하시겠지만, 조금만 노력하면 솔루션을 찾을 수 있는 시대에 살며 불편함을 무조건 인내하고 극복하는 양육자의 모습은 멋있기보단 어리석어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도 돌보지 못하면서 남을 돌보겠다는 건 책임감이 아닌 무책임한 욕심이 아닐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현이가 나중에 커서 아빠처럼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적어도 오늘 교통사고가 난다면 자동차보다는 먼저 병원에 가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자동차보다는 더 오래 살며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을테니. 내일 아침엔 보험사 직원도, 의사 선생님도 아닌 나 스스로 거울을 보며 질문을 던져봐야겠다.

심규성님, 지금 괜찮으신가요?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Fathers’ Update

💬 엄마, 아빠를 떠나서 한 아이를 키우며 일도 하고 있는 직장인으로서 깊은 울림이 있는 오늘 레터 잘 보았습니다. 현 님 분명 10년 후에 더 근사한 답을 하시게 될 거라고 믿어요. 더불어 그 때 송이는 얼마나 멋진 사람으로 커나가고 있을지도 기대되네요! (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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