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 출발한 빨간 버스는 일산으로 향했다. 회사에서는 입사한 지 한두 해 갓 지난 신입사원이었고 집에서는 결혼한 지 몇 달 되지 않은 신랑이었다. 강변북로로 빠지기 전 오른편에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저기 정도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로를 지나 처가에 도착했다. 첫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는 처가살이하기로 했었다.

첫 아이를 낳고 퇴근길에 본 그 아파트 단지에 신혼집을 꾸렸다. 당시만 해도 직주근접이니 역세권, 초품아 등등 생소한 부동산 용어들이 들리던 때였다 (아직 영끌이라는 말이 등장하기 전이었던 것 같다). 보통 재개발 구역이 그러하듯 전통시장을 빼곤 주변이 전부 공사 중이었다. 그곳에서 연달아 둘째와 셋째가 태어났다. 큰아이는 일산에서, 동생들은 서대문구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그 집에서 5년 정도 살고 두 번째 집으로 이사했다.

결혼기념일에 휴가를 냈다. 아이들을 키움센터(전편 참고)에 잠깐 맡겼다. 아내와 함께 뭘 할까 생각하다 한 때 우리의 신혼집이었던 아파트 단지를 다시 찾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옛날 집에서 나와 새집으로 이사 가던 길을 거꾸로 거슬러 갔다. 이삿날 올림픽대로에 드리웠던 노을이 아직 생생한데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 나도 아내도 옛날 집 근처를 가볼 기회가 없었다.

습관처럼 단지 후문 쪽으로 차를 몰았다. 차 앞 유리창에는 미처 떼지 못한 옛날 아파트 주차 스티커가 아직 붙어있었다. 하지만 더는 그 아파트의 입주민이 아닌 관계로 차단기는 올라가지 않았다. 야속했다. 차를 돌려 정문 쪽 상가에 차를 세웠다. 잠깐 심호흡을 하고 차에서 내렸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아파트 단지는 그대로였다. 이곳을 떠난 지 고작 2년이 지났으니 오히려 그대로이지 않으면 이상하겠지. 몇 걸음 옮기니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입구는 페인트칠을 새로 했나 보다. 색깔이 쨍하다. ‘진작 저렇게 페인트칠을 했으면 얼마나 좋아’ 생각하다가 느꼈다. 이 장소가 변하지 않았기를 내가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정문을 지나자 아이들이 다니던 어린이집이 보였다. 아이들을 데려다 주고 유아차를 두던 곳에 다른 유아차들이 세워져 있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작은 광장을 지나 아이들이 하원길에 빠짐없이 들르던 놀이터도 지났다. 그리고 우리가 살았던 동 앞에 멈춰 섰다.

모든 게 그때로 돌아와 있었다. 나도 모르게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처럼. 여기저기에서 아이들이 보였다. 갓난쟁이가 동네 소아과로 가는 유아차 안에 누워 있었다.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가 낑낑거리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집에 가기 싫다고 아이는 길바닥 한가운데 주저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다. 떨어진 열매를 찾아 나무 아래에서 두리번두리번 낙엽을 뒤적인다. 동네 빵집에서 산 빵 봉지를 손목에 걸고 성큼성큼 걸어간다. 땀으로 등이 흠뻑 젖은 아이가 자신이 잡은 곤충을 내밀어 자랑스럽게 보여준다. 오리와 잉어들을 보려고 홍제천을 향하는 아이들은 신이 나 있다.

분명히 존재했던 장면들이었지만 기억에서 옅어져 있었다. 하나의 장면이라도 더 보기 위해 눈에 이 곳 저곳을 담으려 애썼다. 더 많은 시각적인 자극을 원했다. 그러다 문득 아내를 바라보니 아내의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다.

나와 달리 아내에게는 이 공간이 언제 끝날지 모를 힘들었던 시간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따뜻하게 내리쬐는 베란다의 햇살을 음미할 여유조차 없이 하루하루 견디어 냈던 시간. 몇 시간마다 잠에서 깨는 아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아이의 울음. 남편의 퇴근을 기다리는 짧고도 긴 시간. 하루를 간신히 견디어 내면 견디어 내야 할 내일의 반복.

그제야 다른 장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쫓기듯 퇴근해서 지하주차장에 주차한 차 안에서 한숨을 푹푹 쉬는 남자. 서로 자기 가슴을 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부부. 아이들을 간신히 재우고 나면 들리던 애처로운 캔맥주 따는 소리. 견디다 못해 한밤중에 뛰쳐나가 정처 없이 걷던 동네 골목. 답이 없는 질문들까지.

우리는 나약했다. 이곳은 천국이었고 지옥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가 이곳에 다시 돌아오기까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변하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변화를 원했다. 지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기어이 지나갔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이사를 하면서 한 챕터를 마무리하고 다음 새로운 챕터로 넘어갔다.

그러고 보니 아파트 입구 잠금장치는 신형으로 바뀌어 있었다. 예전 입구 비밀번호가 어렴풋이 기억났지만 차마 눌러볼 용기가 나지는 않았다. 아내와 손을 꼭 잡고 차로 돌아갔다. 예전 시간 속의 장면들을 더 보지 못해 아쉬우면서도 더 보지 못해 후련했다. 뉴타운 재개발은 이미 마무리 단계를 지나 뒤쪽으로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이 곳에 신혼집을 꾸렸을 수많은 사람은 여전히 이 곳에서 살고 있을지 궁금해하면서 아이들을 데리러 갔다.

💬 아이와 첫 롯데월드 갔을때, 아이는 “큰놀이터!!!”하며 너무 기뻐했던 그날의 목소리가 생생히 떠올랐어요. 당시 크리스마스 시즌으로 퍼레이드 또한 산타+루돌프 및 요정들로 아름다움을 더했는데, 27개월 아이의 머릿속에는 너무 멋지고 재미있는 공간으로 기억되었나봐요. 그 뒤로 “큰놀이터 가자 또 가자” 한달 내내 노래를 불렀지요. 이 감정과 추억이 부모 머릿속뿐만 아니라 아이에게도 선명하고 깊게 저장되길 바라봅니다.  (다음엔에버랜드)

💬놀이동산에서도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이 정말 와닿네요. 지난번에 에버랜드를 다녀왔는데요.  

월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연차를 과감하게 날리고 온 수많은 부모들 틈 속에서 빠른걸음과 눈치싸움으로 인기코스2개를 끝냈을 때, 막내아들이 오늘 재밌었다고 말해주었을 때, 우리부부는 서로를 토닥이며 격려했습니다. 이정도면 되었다고. (김경모)

💬 놀이공원에 가서도 '일'을 하는 아버님의 모습이 저희 남편과 똑닮았네요. 그런 남편에게 전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우리 꼭 효율적으로 놀아야 할까요? 그냥 같이 노는 건 어때요?" 일분 일초를 아끼면서 더 많은 경험을 시켜주고 싶어하는 아빠의 마음이 짠해요. 모든 아빠들을 응원합니다!!  (초록테이블)

Design by 양수현(@yangsoois) a.k.a 양송이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