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님 설 연휴는 잘 쉬셨나요? 처음 보내드린 특별기고 레터는 재미있게 읽으셨을지 모르겠네요. 외부 기고는 저희도 처음 받아봤는데요. 안해보던 방식이라 님의 마음에 드셨을지 걱정이 됩니다.

안하던 시도를 할 때는 늘 떨리고 걱정되기 마련인데요. 남들과 다르다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이번 레터는 남들과 다르게 '왼손잡이'로 살고 있는 초등생 아들의 아빠 정민 님이 보냅니다. 

“글씨가 좀… 그렇지?”

“뭐… 나도 글씨 잘 쓰는 건 아닌데 뭐. 학년 올라가다 보면 차차 나아지겠지.”

아이가 삐뚤빼뚤 쓴 일기장을 보는 아내의 얼굴에 살짝 근심이 스쳐 지나간다. 순간 멈칫했지만, 짐짓 모른 체 아내를 달랬다. 

유난히 찬 이번 겨울을 지내고 나면 첫째는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 된다. 이제는 학교라는 공동체 생활에 온전히 적응한, 그리고 동시에 공부에 대한 부담 역시 조금씩 늘어나는 시기를 아이와 부모가 모두 맞고 있다. 전에는 '뭐 좀 지나면 괜찮겠지' 하고 넘겼던 사소한 것들도 ‘설마…?’ 하며 점점 걱정으로 바뀌어가는 때다. 

아이는 왼손잡이다. 돌잡이를 할 때도, 처음 수저를 쥘 때도 자연스레 왼손이 먼저 나갔다. 공룡에 미쳐있던 어린이집 시절엔 왼손으로 줄기차게 공룡을 그렸다. 글씨를 배우기 시작할 무렵이 되자 아이는 자연스레 왼손으로 연필을 잡았다. 자신에게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편안한 그 손으로. 

아이가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모습을 옆에서 본 아이 할머니가 뭐라 한 마디 보태려 할 때 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막았다. “왼손이 뭐가 어때서요?”

나도 왼손잡이다. 

불행히도 왼손에 얽힌 기억들은 썩 유쾌한 기억들은 아니다. 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그때부터 기억 속 어른들은 끊임없이 내 왼손에 혼을 냈다. 왼손으로 밥먹으면 복 달아난다. 왼손으로 글씨쓰면 안된다. 오른손으로 밥 먹고, 글씨 써라. 오른손이 바른손이다…

의식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왼쪽 어깨가 조건반사처럼 먼저 나갔다. 왼손이 먼저 나가서 스스로 움찔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몇 번이고 혼이 난 다음에는 어깨에 붕대를 감은 듯 엉거주춤하게 있다가 영 익숙지 않은 오른손을 내밀고는 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오른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겨우 밥을 먹고, 글씨를 쓰는 것 뿐이다. 오른손으로 편하게 젓가락질을 하게 된 것도 초등학교 6학년이 다 되어서였다. 

한창 아이들과 학교 운동장에서 야구를 하던 초등학교 시절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글러브 끼고 야구하는 아이들이 너무 부러웠던 나는 몇날 며칠을 글러브를 사달라 졸라댔다. 아이 성화를 못이긴 끝에 퇴근길 아버지가 사온 싸구려 비닐 글러브는 당연히도(!) 오른손잡이용이었다. '오른손으로는 캐치볼을 할 수가 없는데…?' 그날 내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보나마나 울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구하기도 어려운 왼손잡이용 글러브를 다시 사달라 보채는 건 어린 맘에도 너무 지나친 일이었다. 늘 왼손은 쓰면 안되는 손이었는데, 차마 그 왼손을 위한 무엇을 해달라고 더 떼를 쓸 수가 없었다. 지나고 돌이켜봐도 어린 시절을 통틀어 가장 억장이 무너지는 순간 중 하루였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해보니, 왼손 오른손 할 것 없이 다들 큰 문제없이 살았다. 해외에서 만난 친구들은 더했다. 아니 도대체 난 어릴 때 왜 그렇게 혼나야 했을까? 왼손을 쓰는 게 생사를 가를만큼 중차대한 일도 아니었는데. 

태어난 아이가 왼손잡이임을 알았을 때, 다른 건 몰라도 최소한 하나만은 지켜주고 싶었다. 본인이 가장 자연스럽게 쓸 수 있는 근육을 쓰도록 놔두는 것. 부모로서 아이가 자라면서 챙겨야 할 것은 그것 말고도 차고 넘치니, 너무 지나친 참견이라 생각하는 건 먼저 알아서 삼가자고. 

아이의 글씨가 아직도 초등학교 갓 입학했을 때와 큰 차이가 없는 게 왼손잡이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행되는 한국어 가로쓰기가 왼손잡이에게는 다소 불리한 방식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꼭 그것 때문에 또래 아이들보다 글씨가 덜 단정하다고 볼, 그래서 글씨쓰는 손을 오른손으로 바꿔야 할 과학적(?) 근거를 아직은 못찾았다. 글씨쓰기 연습을 좀 더 하면 나아질수도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전에 손글씨 조금 삐뚤빼뚤한 것 정도가 아이의 미래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ChatGPT같은 생성형 AI가 요즘 한창 IT 업계의 화제란다. 글쓰기나 그림그리기 같은 창작의 영역마저 인공지능이 인간을 도와주는 세상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데, 손글씨 좀 못쓰면 어떤가.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 

(...)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 

(...)

자기가 보지 못한 자기를 다시 보는 것. 부모가 됨으로써 한번 더 자식이 되는 것. 사람들이 자식을 낳는 이유는 그 때문이지 않을까? 

— 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 p.79-80》 (창비, 2011)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좋은 점은 잊어버렸거나 잘 생각나지 않는 나의 어린 시절을 한 번 더 살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 강동원 송혜교 주연의 영화로 각색되기도 했던 김애란 작가의 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에서 언급되는 내용이다. 이번 레터는 이 생각을 다시금 일깨워 준 손현 작가의 인스타그램 포스팅에 빚을 지고 있다.  - 저자 주

아이와 살며, 어린 시절을 다시 한 번 살아가고 있다. 왼손 쓰다 혼났던 일처럼 썩 좋지만은 않은 기억도 되살아날 수도 있지만, 그것조차도 육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다. 영문도 모르고 혼나서 풀죽어 있던 어린 나를 다시 만나고, 그 아이가 가진 상처를 다시 보듬으며 과거와 화해할 수 있는 경험이 되기도 하니까.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 함께 사는 아이들이 비슷한 시행착오를 겪지 않도록 도울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지난 연말에는 첫째와 함께 남자들끼리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이름하여 ‘하고 싶은 것 다해도 돼 여행.’ 평소에 늘 동생이랑 싸우지 마라 사이좋게 지내라 주절주절 잔소리만 늘어놓는 게 미안하던 차였다. 그래서 이번 여행을 떠나면서는 첫째가 가장 바라는 소원, 본인이 늘 갖고 싶다고 노래부르던 ‘닌텐도 스위치’ 게임기를 선물로 안겨 주었다. 그리고 여행 내내 실컷 하게 내버려두었다. (아내가 동행했다면 못내 떨떠름해했을 것이다.) 

한창 포켓몬을 잡으며 옆에서 싱글벙글인 아이는 모르겠지만 그 게임기, 사실 알고보면 삼십여 년 전 비슷한 또래였을 어린 내가 우리 아이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하다. 친구네 집에 있던 재믹스나 게임보이 게임기가 그렇게 부러웠지만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그 마음, 아빠는 너무 잘 아니까. 

Fathers’ Update

첫 외부기고였던 지난 레터 49화 아이가 없는 평행우주에 보내주신 답장들을 소개할게요. 고맙습니다.

💬 피드백이라고 하기엔 거창한데... 편지를 읽고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글썽, 맺혔어요. 그런데 육아가 (절대로) 아름답지만은 않잖아요. 돌아봤을 때 아름다운 장면, 장면으로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인생의 속임수이자 진통제 같아요. 그리고 저도 아이가 없는 삶으로 돌아갈 수 없기에 참 공감이 많이 되었어요. 좋은 글 감사해요. (밤박하)

💬 어떤 일을 하거나, 어디에 살거나, 얼만큼 나이를 먹었거나 그 누구에게든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것은 우주의 빅뱅과 같은 일이구나 싶었어요. 비록 블랙홀처럼 내가 사라지는 것 같은 경험과 가능한 내 모든 욕구를 뒤로 미룬채 다른 존재의 욕구를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는 삶은 여전히도 참 버겁지만, 내 삶이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한 삶이 될 수 있는 가장 특별하고 소중한 경험을 즐기며 오늘도 하루를 시작합니다. 크고 많은 눈이 내리네요. 저의 그분은 눈 길에 작은 발자국을 남기며 등원하셨습니다. 조금은 고요해진 우주, 어서 오늘의 업무를 하려 가야겠어요! (sem kim)

💬 마지막 문장이 심장을 쿵 때렸습니다. 맞아요. 저도 아이가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제 아이는 이제 아홉살이 되었어요. 주변 분들이 육아가 힘들지 않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지금까지 살면서 겪었던 슬픔과 고통의 100배를 느끼게 될거고, 그와함께 100만배의 행복과 환희를 경험하게 될거야." 이 말에 완전 진심입니다. 너무 힘들고 너무 행복하니까요. 평행우주에 대해 말씀주셔서 아이가 어릴 때 제가 얘기해준게 생각이 납니다. 사실 엄마는 파워레인저 옐로우였다고. 파워레인저를 하면서 엄마역할을 할 수는 없어서 엄마를 하기로 선택했다고. "아~ 그래서 엄마가 힘이 센거구나!" 아이가 한동안은 굳게 믿어주었지요. 나중에 정정해서 알려줬어요. 엄마가 힘이 센 이유는 너의 엄마이기 때문이라고요. (초록테이블)

💬 그러게요. 출산 전 만 해도… 우리 연애때는 ~ 하며 식탁에서, 침대에서 연애시절, 데이트 한 이야기를 많이 주고 받았는데  아이 낳고 나서부터는 식탁에서 침대에서 오늘 아이가 ~했어! 너무 신기했어!!! 하며 아이의 일상이 가득 담긴 이야기를 주고 받네요. 가끔 아이를 부모님께 맡기도 자유부부가 된날 만큼은 아이 이야기가 안나올 줄 알았는데 늘 나와요. ”지금 아이는 뭐하고 있을까?“ 하면서 말이에요 :) (Ji0)

님, 오늘 보내드린 편지는 어땠나요? 썬데이 파더스 클럽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제안/피드백/질문이 있다면 아래 링크를 통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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