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수 년 전, 집 근처 버스 정류장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반가운 얼굴이 보여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고 동네에 하나뿐이던 스타벅스로 같이 들어갔다. 같은 학교를 다닐 때부터 한 번 시작하면 주야장천 말하던 친구였기에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친구는 이제 막 4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나온 상태였다. 대화 주제는 당연하게도 훈련소 이야기.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듣는 동안 이 상황을 파악할 만한 몇 가지 단서가 떠올랐다.

1. 친구는 공익근무요원이었다. (참고로 이 호칭은 2014년 1월 1일부터 사회복무요원으로 바뀌었다.)
2. 나도 군인이었다. 아마도 상병 정도 됐을 거다.
3. 마지막으로 친구는 4주간의 기초군사훈련에 대해 당시 육군 상병(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군인)에게 무려 3시간 이상 본인의 고생 담을 말하고 있다.

군 복무 경험이야 누구나 처음 겪는 힘든 시간이다. 친구는 훈련을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생생한 기억을 더욱 열 올리며 이야기했겠지만 군 생활을 비교적 편하게 한 내게도 그 3시간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처음에는 맞아 맞아, 그래 그래 맞장구를 치다가도 시간이 길어지자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유별난 친구이긴 했다. 자기 이야기를 그렇게 깊게, 그렇게 오래 하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그 후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군대 가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들 거라고 생각했던 군인은 어느새 아이 셋을 키우고 있다. 잠든 아이들의 숨소리만 옅게 들릴 정도로 세상이 조용해지는 밤 10시 무렵. 하루치를 살아냈음에 안도할 때쯤 휴대전화가 규칙적으로 진동한다. 또래 아빠들의 전화다. 아이를 간신히 재우고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부여잡고 누군가와 대화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전화를 했겠지. 그나마도 이렇게 전화할 정도면 그들의 아이가 두세 시간마다 깨는 신생아 시기를 무사히 넘기고 밤에 통잠을 자기 시작했으리라 짐작한다.

반가운 마음에 초록색 통화 버튼을 누르고 간략하게 안부를 주고받는다.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육아 이야기 시작. 분유 이야기, 이유식 이야기, 기저귀 이야기, 어린이집 이야기. 아이 이야기, 아내 이야기, 본가 이야기, 처가 이야기… 쌓이고 쌓인, 얽히고설킨 이야기가 한동안 이어진다.

3시간 정도는 거뜬히 들어줄 생각으로 휴대전화 충전기를 찾을 즈음 친구들은 이야기를 뚝 멈춘다. 그리고 기다린다. 정적.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 키우기도 이렇게 힘든데 너는 어떻게 셋을….”

이제 내 이야기를 시작하라는 신호다.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자백하여 ‘아, 나는 그나마 다행이구나, 저렇게는 살지 말아야지’ 위로해달라는 신호. 나는 부여받은 역할을 마다하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제 막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나온 공익근무요원처럼. 

아이가 셋이라고 하면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가 있다. 뭔가 어마어마한 시련을 겪어 몸과 마음은 너덜너덜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를 살아낼 것만 같은. 지금이야 시간이 조금 지나 딱히 애가 하나라서 덜 힘들고 둘이라서 더 힘들고 셋이라서 무지막지하게 힘들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물론 처음부터 육아가 쉬웠다는 말은 아니다. 셋째까지 빵빵빵 차례로 태어나면서 ‘나는 과연 핸들이 고장난 8톤 트럭인가?’ 라는 의심을 안 해본 것도 아니다. (첫째와 셋째가 30개월 터울인지라 핸들보다는 브레이크 쪽 고장을 의심해볼 법도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유튜브를 2배속으로 보고 있다. 자녀 계획이 없는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 무심결에 이 사실을 말했더니, 그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느낌이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약간의 타협이 필요했다. 일하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뺀 나머지에 대한 타협이다.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픈 마음은 (지금도) 굴뚝같지만 그러진 못했고, 자는 시간을 줄였다간 며칠 안 가 몸이 버티질 못했다. 그래서 작고 소중하고 귀여운 그 나머지 ‘나만의 시간’을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 전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 보는 시간을 줄인다거나, 밥 먹고 설거지하기까지의 시차를 줄인다거나,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샤워기 밑에 서 있는 시간을 줄인다거나 운동할 시간을 줄...(아, 운동은 아이 생기기 전에도 안 했구나.) 그러다가 끝끝내 유튜브의 2배속 재생 버튼을 누르고야 만 것이다.

얼마 전 아이 키우는 아빠들끼리 같이 글을 써 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도대체 이런 생각을 하는 아저씨들은 어떤 아저씨들인가. 궁금한 마음으로 랩탑 앞에 앉아 전달받은 줌 링크로 접속했다. 간단히 자기소개를 마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머쓱하게 마치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듯 “요새 유튜브를 2배속으로 보고 있네요”라고 말했다.

놀랍게도 아무도 눈이 휘둥그레 해지지 않았다. 다들 별 반응이 없어 오히려 내 눈이 휘둥그레 해질 지경이었다. 몇몇 아빠들은 진작에 모든 영상을 2배속으로 보고 있었다며 그게 별 일인가 하듯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아빠들 사이의 어떠한 연대감을 느꼈다기엔 조금 거창하고 약간의 소속감을 느끼게 된 계기였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살고 있는 아빠들이 있긴 있구나. 

돌이켜보면 난 대체로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운이 좋아 군대를 편하게 다녀왔고 운이 좋아 사랑하는 여자와 아이 셋을 낳아 함께 살고 있다. 앞으로도 종종 약간의 드립과 약간의 자기 냉소, 그리고 운을 담아 ‘생각 없이 산 것치곤 결과가 나쁘지 않군’이란 느낌으로 사는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반가워요 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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