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메리 크리스마스! 아이와 함께 사는 가족이라면 크리스마스 선물과 이벤트를 준비하느라 한동안 분주하셨을 것 같아요. 다들 고생 많으셨어요. 어릴 적에는 꼭 크리스마스나 어린이날이 아니어도, 선물을 기대하던 기억이 종종 있었는데요. 부모가 되어 선물을 준비하는 입장이 보니 현실적인 고민만 늘어나네요. 이번 레터는 아들 셋 아빠 정우 님이 보냅니다.

+) 오늘은 레터가 20분 늦었네요. 저희도 가족과 함께 하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려요 ^^;

결혼 준비가 한창일 때였다. 예복을 맞추러 갔다. 재단사는 노련하게 얇은 노란색 줄자를 여기저기 대면서 치수를 재고 있었다. 허리 둘레를 잴 땐 웬일인지 반주먹 정도 여유를 두고 치수를 기록했다. 핀으로 가봉을 잡은 바지를 입으니 역시나 허리춤이 헐렁했다. ‘아무래도 이래 가지고는 좀 크겠는데요’ 하는 눈빛으로 재단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예상했다는 듯 말했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무성의하게. “결혼하면 살 빠질 거 같죠? 안 빠져요.”

결혼이라는 걸 두세 번 해본 것도 아니고, 처음하는 내 입장에서 그렇게 확신에 찬 그의 말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과연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넉넉했던 예복 바지는 재단사의 말대로 단추를 채우면 금세 호흡곤란이 올 지경이 되어버렸다. 결국 가지 않아 엉덩이 부분이 해져 못 입게 되고 말았다.

계절이 바뀌면 미루고 미루다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을 때에야 아이들의 옷장을 정리한다. 반팔, 반바지 그리고 얇은 옷들은 옷장 깊숙히 들어가고 어둠 속에 있던 두꺼운 옷들을 앞으로 꺼낸다. 다행히 첫째와 둘째는 덩치가 비슷해 정리할 옷이 많지 않다. 막내마저 못 입을 정도로 작아진 옷들은 따로 모아둔다.

예전 같으면 버리기 아까워 여기저기 아이 키우는 집에 수소문해 옷을 나눴겠지만 큰 형, 작은 형, 막내까지 세 아이의 몸을 거친 옷들은 누구한테 주기에 민망할 정도로 낡아버리고 만다. 집이 좁아 다 보관할 수도 없는 노릇. 결국 몇장만 고르고 골라 기념(?)으로 빼두고 나머지는 눈 질끈 감고 의류수거함에 넣는다. 만감이 교차한다. 작아진 옷을 보면 그 작은 옷을 입고 있었던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이 옷은 대부분 해외직구로 산다. 국산만큼 예쁘고 튼튼한 옷이 없지만 제 아무리 국산이라도 아이 셋을 거치게 되면 금방 무릎에 구멍이 나고 목은 늘어나고 만다. 하루가 다르게 크는 아이들에게 ‘좋은 옷을 사서 오래 입는’ 어른들의 잣대는 적용하기 어렵다. 그래서 해외 아동복 사이트에서 세일 할 때를 기다린다. 학교 다닐 때 친구 중 유독 폴로 옷이 몇 벌씩 있는 친구들은 알고 보면 미국 사는 고모가 해마다 박스 채로 옷을 보내준다고 하더라. 나도 그렇고 우리 아이들도 그렇고 안타깝게도 미국 사는 고모는 없다. 내가 직접 고르고 주문해서 박스채 받는다. 우리나라에서 티셔츠 한 장 살 돈으로 두세 장을 살 수 있다.

해외직구를 한다고 고급 브랜드 옷을 사는 건 아니다. 면세 한도*가 적은 까닭도 있지만 아이들 크는 속도를 따라가려면 부지런히 아이들의 껍데기를 갈아줘야 하기 때문이다. 큰맘 먹고 산 좋은 옷들을 몇 번 입히지도 못한 채 어느새 아이 몸에 작아지기도 하고, 형들과 동생의 중간 사이즈 옷들은 옷장 정리 때 뒤늦게 발견되기도 한다.

* 자가사용물품 면세기준은 미화 150달러 이하. 미국은 200달러 이하.

아이들 어린이집 등하원 시간이었다. 날이 쌀쌀해지니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거의 모두가 팔뚝에 종 모양 로고가 박힌 검은 혹은 남색의 몽클레르 패딩을 입고 있었다. ‘어떻게 아이들까지 그 좋은 옷을 입히나’ 감탄을 했다. 어느날 거의 처음으로 팔뚝에 로고가 들어가 있지 않은 패딩을 입은 아이를 봤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이 아이가 우리 아이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 아이는 신발을 벗고 어린이집 현관에서 잠바를 벗었다. 안감에는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체크무늬가 있었다. 등원을 마친 아이의 부모는 말 모양 로고가 붙은  SUV를 타고 떠났다.

아이를 낳기 전, 아이를 키우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있다. 그중 이런 장면이 있다. 아이가 다가와 말한다. “아빠, 나 나이키 신발 사줘.” 나의 발을 내려다 본다. 만약 내 발에 슬래진저나 니코보코가 신겨 있다면, 나는 아이에게 선뜻 나이키 신발을 사줄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 왜 그렇게 내 상황을 단정하냐고 물었다. 더 아끼고 더 벌어서 아비나 자식이나 둘 다 나이키 신을 생각은 왜 하지도 않냐고 했다.

언젠가 계절마다 옷장 정리하는 일의 번거로움을 소셜미디어에 올린 적이 있다. 그 포스트를 본 학교 선배이자 육아 선배는 별 게 고민이라는 듯, “계절 금방 가. 그냥 둬.”라고 댓글을 달았다. 만약 조언이라면, 꽤나 무성의한 조언이라고 생각했었다. 심지어 어느 정도 확신에 차 있는 무성의한 조언이라니, 예복을 맞추던 재단사가 생각났다.

금방 생각이 바뀐다. ‘맞아, 듣고 보니 그러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일 때도 있다. 내가 무슨 문제를 겪든, 나보다 앞서 그걸 경험한 사람들이 있다. 얼마나 다행인가. 아무도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할 때 그들은 이렇게 쉽게 답을 줄 수 있는데. 

지금 사는 집은 아이 셋과 살기에 좁다. 계절마다 옷장을 정리해줘야 하지만, 조금 넉넉한 집으로 이사를 가면 굳이 이렇게 부지런 떨 일이 없을 터였다. 애매한 크기의 옷들을 두고 한참 고민하다 다음 계절에 한 번이라도 더 입힐 수 있길 바라며 다시 옷장 깊숙이 넣는다. 다시 이 옷들을 꺼낼 때, 아이들은 옷이 옷장에서 지낸 만큼 성장해있을 것이다. 

결국 아내 말대로 내 발, 네 발 모두의 발에 나이키부터 신기고 볼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계절은 다음 해에도 어김없이 오겠지만 이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기에.

Fathers’ Update

지난 레터(44화 크리스마스에는 손톱을)에 보내주신 답장들을 소개할게요. 고맙습니다.

님, 오늘 보내드린 편지는 어땠나요? 썬데이 파더스 클럽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제안/피드백/질문이있다면 아래 링크를 통해 알려주세요!

썬데이 파더스 클럽에 보낸 지난 편지가 궁금하다면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썬데이 파더스 클럽의 편지를 혼자 읽기 아깝다면? 썬파클이 필요한 주변 사람에게 아래 구독 링크를 공유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