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일하기 싫은 날이 있듯, 육아하기 버거운 날이 있죠. 이럴 땐 어떻게 스트레스를 해소하시나요? 육퇴 후 나만의 해피아워가 있는지, 나만의 웃픈 육퇴 에피소드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번 레터는 육아 슬럼프를 겪고 있는 16개월 송이 아빠 현 님이 보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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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하기 싫은 날이 간혹 있다. 실은 거짓말이다. 어쩌다가 한 번씩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그런 감정이 든다. 일주일에 거의 한 번꼴로. 대부분의 직장인에게 ‘월요병’이 있듯, 내게는 ‘수요병’ 또는 ‘목요병’이 생겼다. 육아에 평일과 주말 구분이 없다지만 그래도 한 주의 가운데에 있다는 느낌 때문일까. 수요일이나 목요일마다 고비가 한 번씩 온다.

하기 싫은 걸 자세히 따져보면, 주로 밥을 차리고 치우는 일이다. 평소 내 끼니도 잘 챙기지 않았던 편인데, 누군가의 세 끼를 꼬박 챙기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몰랐다. 지난봄에 종영한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는 삼남매의 엄마 곽혜숙이 밥 짓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오죽하면 모두가 외지인 구 씨에 열광할 때 나는 곽 씨에게 감정이입했을까. 드라마는 그의 고된 얼굴을 여러 번 보여준다. 한 번은 잠시 식탁에 앉아 쉬는 곽 씨의 옆모습과 벽에 걸린 가족사진이 한 프레임에 잡혔는데, 그 장면의 여운이 유독 짙었다.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고, 육아에 해방은 없다.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 오후 회의가 길어져서, 저녁까지 더 일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아. 천천히 일하다 와. 내가 송이 재울게.” 손 씨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빠르게 굴려본다. 송이 저녁식사는 어떡하지? 점심에는 찹쌀을 섞은 잡곡밥과 조부모님이 갖다 주신 배추 된장국을 데워 함께 먹였다. 저녁에 같은 메뉴로 또 먹이면 아마 나라도 먹지 않을 것 같다.

16개월에 접어든 송이는 아직 밥에 진심인 편이 아니다. 아이에게 밥을 차릴 땐 복권을 긁는 심정이다. 잘 먹는 날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인다. 맛있다는 뜻. 그렇지 않을 땐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미간도 찌푸린다. 딸의 미각이 더 예리한 걸까. 그렇다고 먹지 않는 얘를 앞에 두고 “아니, 이 녀석이!”라고 혼낼 수도 없다. 아직은 훈육이 통하는 시기가 아니다.

그나마 송이가 잘 먹는 음식들이 있다. 갓 지은 쌀밥, 미역국, 토마토로 요리한 건 대체로 잘 먹는다. 계란 요리도 잘 먹는데, 요즘은 시큰둥하다. 대신 잘 먹는 음식에 요거트가 추가됐다. 내가 아침으로 요거트에 그래놀라를 얹어 간단히 해결할 때, 몇 숟가락 줬더니 잘 먹는다.

결국 그날 저녁은 밖에서 해결했다. 산책을 하고 마트에서 장도 볼 겸 집 밖을 나섰고, 유아용 의자가 있는 칼국수 가게에 마주 앉았다. 간이 덜 배인 칼국수 면발을 식혀서 주니 송이는 그걸 손에 집고 오물오물 먹었고, 불고기와 계란이 들어간 덮밥은 거의 먹지 않았다. 여전히 적극적으로 먹진 않았다. 점심까지만 해도 잘 먹었는데…. 송이가 싫증을 내기 전에, 내 앞에 놓인 그릇이라도 서둘러 끝내자는 생각에 칼국수에 김치를 곁들여 호로록 먹었다. 다시 유아차를 끌고 집으로 오는 길엔 나만 배부른 것 같아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빠가 더 부지런했다면 미역국이라도 끓였을 텐데. 미안해. 다음엔 미역국 자주 끓여줄게.”

육아 고충 중 하나는 속 터짐을 속 터지게 하는 당사자에게 토로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아이에겐 죄가 없으니 모든 게 내 탓이 되기 쉽다. 그래도 스트레스는 해소해야 한다. 나는 맥주를 마시거나 테니스를 친다. 둘 다 통통 튀는 행위를 동반하는 공통점이 있다. 전에는 저녁을 먹으면서 맥주를 곁들였는데, 아이를 재울 무렵 내가 먼저 졸리는 경우가 많아 요즘은 송이가 오후 낮잠을 잘 때 한 캔을 미리 딴다. 나만의 해피아워랄까.

며칠 전에는 송이를 재우고 한 캔 따야지, 라는 생각으로 침대에 함께 누워 라디오를 틀었다. 91.9MHz로 주파수를 맞추니 윤도현 DJ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날은 마침 윤도현이 어린이 친구들과 전화하는 ‘얘들아 놀자’ 코너가 있었고, 초등학교 4학년이라고 본인을 소개한 어느 어린이와의 통화가 인상적이었다. DJ가 마지막으로 아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물었다. 어린이는 몇 초 뒤 또박또박 말했다. “아빠, 내 아빠로 있어줘서 언제나 사랑해.” 이 아이의 아빠가 당시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면 어떤 마음이었을까. 부럽고 뭉클해 잠시 눈물이 고였다.

“절대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에요.” 시간이 빨리 흘러 송이가 훌쩍 큰 모습을 상상한다고 했더니, 지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에겐 이미 중2 아들이 있다. 만약 지금으로 돌아간다면 무얼 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더 많이 안아주고, 더 자주 ‘예쁘다, 사랑한다’ 말해주고 더 많이 놀러 다녔을 거예요. 무엇보다 화는 덜 내고 더 많이 믿어주고요. 그땐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도 뒤돌아 보면 아쉽네요.”

무더운 여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현재의 후텁지근한 공기도 추운 계절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리워지겠지. 동시에 나만의 해피아워보다는, 딸과의 해피아워를 조금씩 더 늘려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이 시간은 절대 돌아오지 않으니까. 그리고 혹시라도 송이가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는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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