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캐나다에서 온 편지] 이번 레터는 육아휴직 중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정우님이 보냅니다. 온 가족이 캐나다로 간지 반년도 되지 않았는데 견디다 못해 다시 한국으로 잠시 돌아왔었다고 하는데요. 통장 잔고는 가벼워졌지만 마음만은 묵직하게 채워 돌아갔답니다.

+) 다음주는 설 연휴로 인해 휴재입니다. 설 이후에는 약 3주 가량 프로젝트 레터를 연달아 발송해 드릴 예정입니다. 참고 해주세요. 모두 즐거운 설 연휴 보내세요 :)

갑자기 한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예 들어가는 건 아직이고 아이들 학교 겨울방학 동안만 잠깐. 우리나라를 떠난 게 여름께였으니 연말에 가면 반년도 채 되지 않고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학교생활을 버거워하던 아이들이 '한국, 한국' 노래를 불렀다. 곧 외할머니의 구순 잔치도 있었다. 처형의 둘째 아이 출산일이 임박하기도 했다. 제대로 써보지 못한 항공사 마일리지가 곧 소멸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캐나다에서도 송년과 신년 그리고 특히 크리스마스의 분위기가 물씬 나기 시작했지만, 아직 이곳의 우리는 이곳의 한 해를 떠나보낸다거나 새로운 해를 반길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번 하고 나니 멈추기 힘들었다. 컴퓨터를 켰다. 연말·연초 성수기인지라 유상항공권은 너무 비쌌다. 5명 모두 비행기 표를 살 돈이면 중형 중고차 한 대 살 수 있을 지경이었다. 큰 기대 없이 마일리지 자리가 나면 가고, 나지 않으면 어떻게든 캐나다에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처음에 어렵게 예약한 표는 몬트리올에서 시카고로, 시카고에서 도쿄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쿄에서 서울로 가는 여정이었다. 아내는 세 번 경유하는 항공권을 발권한 나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행히 출발 며칠 전, 경유를 한 번만 해도 되는 일정으로 항공권을 새로 발권할 수 있었다.

한국행이 거의 확실해지자 가족과 지인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가족들은 간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오느냐, 돈이 썩어나느냐, 아주 살만한가 보다, 이게 맞냐 등등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우리의 귀국을 마음 놓고 반기는 건 외할머니와 장인어른 두 분 뿐이었다. 뉴욕 뉴어크 공항 근처 호텔에서 조용히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고 다음날 존 F. 케네디 공항으로 이동하여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도착 첫날밤에 아이들과 동네 편의점부터 들러 삼각김밥과 편의점 도시락을 샀다. 전에 사용하던 새벽 배송 멤버십도 되살려 몇 번을 주문했다. 회전초밥집에 가서 여러 가지 싱싱한 횟감이 올라간 초밥을 실컷 먹었다. 외할머니 구순 잔치에서 중식을 코스로 먹었고 하루 뒤 막내 생일에는 동네 중국집을 찾아 막내가 좋아하는 짜장면을 다시 먹었다. '곰탕 먹자'고 할 땐 아무 반응이 없다가 곱창 먹으러 가자니까 일제히 콜을 외친 군대 동기들과도 저녁을 함께했다. 같은 회사 사람들에게는 귀국 사실을 알리지도 못했지만 정작 거래처 직원들과는 우육면을 먹으며 업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야기를 들었다. 신혼 초에 가끔 가던 비빔국수와 돈가스 집에도 들렀다. 외할머니댁에 머무른 며칠 동안 엄마 밥도 실컷 먹고 할머니 동치미도 끼니때마다 먹었다. 처형네 둘째가 태어나는 것까지 볼 수는 없었지만, 처형 부부가 다니는 스포츠센터 구내식당에서 솥밥과 생선찜 그리고 제육 볶음에 누룽지까지 알차게 싹싹 먹었다.

벌써 돌아가기 하루 전날이 되었다. 아이들을 장인어른 손에 잠시 맡기고 아내와 약국으로 향했다. 열흘 여행에서 처음으로 아내와 단둘이 있을 시간이 생겼다.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할아버지 약사가 늦은 시간 약국을 지키고 계셨다. 외국으로 간다고 아이들 약을 위주로 부탁했다. 어디로 가느냐, 얼마 동안 있느냐, 아이는 몇이냐, 캐나다는 약 한 통 집으면 무조건 10달러보다 비싸더라. 약사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어린이용 해열제, 진통제, 소염제, 소화제, 종합감기약.. 다 확인하고 계산하려던 순간 잊고 있던 약이 생각났다. 내가 필요한 약. 지루성 피부염 연고. 두피에서부터 눈썹 그리고 코 주위에 자주 말썽이 생겨서 알레르기 비염약만큼이나 자주 의지하게 된 약이다. 캐나다에 가고부터 비염약은 거의 필요가 없어졌지만, 연고는 여전히 가끔 발라야 했다. 약사는 누가 왜 필요한지 확인하면서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처음으로 눈을 맞췄다.

“에이, 이런 연고는 안 바르는 게 좋아. 심장에 열이 많은가?” 

보통 약국에선 처방전을 건네거나 증상을 말하면 필요한 약을 받고 계산을 하면 끝나지 않나? 지나가는 누군가가 나를 지나가는 말로라도 염려해준 적이 있었던가? 심장 열과 지루성 피부염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나? 아니, 심장도 열이 나기는 나나? 약사에게 인사를 하고 약국을 나왔다. 아내 손을 잡고 되돌아가는 길에 심장에 열이 오르면서 괜히 가슴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캐나다로 돌아가는 여정도 처음에는 서울에서 도쿄로, 도쿄에서 워싱턴, 워싱턴에서 몬트리올로 가는 일정이었는데 다행히 출발 며칠 전 서울에서 뉴욕으로 바로 가는 마일리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제트기류 덕분에 뉴욕에서 서울 오는 비행기는 15시간 30분이 걸렸지만 되돌아가는 건 (무려!) 13시간 50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아이들도 장거리 비행기에 익숙해졌는지 알아서 영화를 보기도 하고 리모컨으로 게임을 하기도 했다. 승무원은 대견하다며 아이들 손에 과자를 한 봉지씩 쥐여주었다. 아이들은 게 눈 감추듯이 과자를 먹었다. 승무원은 다시 아이들에게 와서 한 봉지 더 줄까 물었다. 막내가 그 와중에 목이 마르다고 해서 난감해하고 있는데 승무원은 과자를 주면서 마실 것도 필요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아이는 사과 주스를 주문했다. 승무원이 덧붙였다.

“아버님은요?”

아이들에게 간식이 필요한지 묻고, 다시 한 번 더 묻고, 음료도 챙긴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행위의 배경에는 꼼꼼한 서비스 매뉴얼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마지막 질문은 (설령 그런게 있든 없든) 매뉴얼을 넘어 인간적인 고마움을 느끼게 했다. 아이들을 챙기면서 긴장을 하고 있었는지 누군가의 챙김(?)을 받고나서 그 긴장이 기분 좋게 풀렸다. 그때 받아마신 물은 쌈밥 기내식만큼이나 감동적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우리는 곧장 렌터카 사무실로 갔고 미니밴을 6시간 운전해서 집에 도착했다. 한국행은 온전히 나의 욕심이었다. 가만히 있는 아이들을 쿡쿡 찔러서 엄마한테 한국 가고 싶다고 말하게 한 것도 나였다. 생활비가 빠듯한 걸 뻔히 알면서도 무리를 했다. 아무도 나를 반가워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떠났다. 나를 반기지는 않더라도 아이들을 반기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 외할머니가 슬쩍 내 앞으로 밀어 놓은 동치미를 마셨다. 약사가 되도록 바르지 않는 게 좋다고 말한 연고는 아직 바르지 않았다. 승무원이 건넨 물 한 잔을 마셨다. 한국음식에 대한 허기를 채우면서 마음의 허기도 채워졌다. 이제는 정말 돌아갈 때까지 한국에 다시 가기는 어렵겠지만 그때까지 아이들도 아내도 그리고 나 자신도 잘 챙기면서 버텨봐야겠다.

Fathers’ Up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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